호텔방에는 빈 위스키 병 여러 개가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취한 목소리로 그는 옛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도 일본에 있었나. 이런 작은 나라에 집착하지 말고 더 큰 나라에서 활약하는 게 낫지 않겠나.”
통화가 끝난 뒤 그는 욕실에서 허리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8년 2월 19일 오전 3시 일본 중의원 의원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는 50세의 짧은 삶을 이렇게 마감했다.
아라이는 1948년 일본 오사카의 작은 마을에서 재일교포 3세로 태어났다. 본명은 박경재. 1966년 가족 모두가 차별을 견디지 못해 귀화한 뒤 이듬해 도쿄대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곧바로 일본의 유명 제철회사에 입사한 뒤 국가고시를 치러 대장성 관료가 된다. 이곳에서 그는 자민당 부총재인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장관의 눈에 띄어 정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그러나 정치는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1982년 도쿄 2구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한 그에게 극우파의 대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는 ‘조선인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며 연일 맹공을 퍼부었다.
이시하라의 비서가 그의 선거 포스터에 ‘1966년 북조선에서 귀화’라고 적힌 검은 딱지 3000장을 붙인 ‘검은 실(seal) 사건’이 일어나면서 아라이는 첫 선거에서 참패했다.
1986년 치러진 두 번째 선거에서 재일교포로선 처음으로 일본 중의원 의원이 된 그는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며 개혁의 선봉에 섰다. 그는 정치구조 개혁 등을 외쳐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보수적인 원로 의원들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 22일 일본 신문들은 ‘닛코증권, 아라이에게 부당 이익 제공’이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증권사가 아라이의 차명계좌를 개설해 정치자금을 수억 원이나 부풀려 줬다는 것. 이는 당시 일본 정치인들에게 오래된 관행이었다. 그는 “조선인이라 억울하게 차별받고 있다”고 항변했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중의원에선 그의 체포동의안을 의결하기로 했다.
그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다. 부활을 위한 정치적 터전도, 신념을 같이하는 동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첫 ‘자이니치’(재일동포) 중의원의 꿈은 그렇게 외롭게 끝이 났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