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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손학규의 진보, 민주당의 길

입력 | 2008-02-22 19:58:00


어차피 칼자루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이 쥔 싸움이었다. 대선 압승과 작은 정부의 명분, 새 정부의 출범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제 앞에서 “해양수산부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의 결기는, 결과론이라고 할지언정 ‘파국(破局)에 이은 결단’의 수순이었을 뿐이다. 작은 정부를 경제 살리기의 전제 조건으로 삼은 신권력이 통일부와 여성부에 이어 해양부까지 존치(存置)시킬 수는 없으리란 것쯤은 손 대표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라는 부사를 사용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위한 장치를 설치했다. 그리고 ‘반드시’를 ‘국민을 위한 양보’로 환치(換置)함으로써 그 효과를 살려 냈다. 이 당선인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막바지 협상 직전에 서둘러 조각(組閣) 명단을 발표한 것도 극적 반전(反轉)을 위한 무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남는 장사’ ‘밑지는 장사’

그렇다면 누가 ‘남는 장사’를 하고, 누가 ‘밑지는 장사’를 한 것인가? 13부 2처의 원안(原案)에서 15부 2처로 후퇴한 이 당선인이 밑지는 장사를 하고, ‘양보의 결단’을 앞세운 손 대표가 남는 장사를 한 것인가? 그 반대로 사실상 ‘양보 아닌 굴복’을 얻어 낸 이 당선인이 이문을 남긴 것인가?

하지만 이런 셈법은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정치세력 간 타협을 언제까지 ‘남고 밑지는 장사’의 셈법으로 계산해서는 민주 정당정치가 설자리가 없다. 갈등과 다툼, 설득과 타협은 효율성만으로 대신할 수 없는 민주 정당정치의 가치이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 상이한 평가가 가능할 수는 있어도 타협, 그 자체는 존중되어야 한다. 완승(完勝)은 독재에서나 가능하다. 그런 시대가 다시 올 수는 없다.

이제 손 대표와 민주당은 그들의 존재 이유와 양식이란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정부조직법 개편에서 누가 남고 밑지고를 셈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손 대표가 ‘이명박의 대항마’로 우뚝 섰다는 내부평가에 솔깃할 처지도 아니다.

손 대표는 ‘중도적 실용적 가치를 지향하는 실천적 진보’를 말한다. “기능을 중시하고 사람에 대한 가치가 돋보이지 않는 이 당선인의 실용주의”와는 달리 “생명과 평화 속에 국민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실용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시장이 다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 소외계층과 약자에 대해 적극적인 배려를 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따뜻한 시장경제야말로 지켜내야 할 진보적 가치”라는 것이다.

실용주의라는 말은 ‘행위’를 뜻하는 희랍어 프라그마(pragma)에서 나왔고, 프라그마는 실천(practice)이나 실제적(practical)의 어원(語源)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실용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는 실천의 방식에 가깝다. 그러므로 손 대표는 ‘실천적 진보’의 실제적 방식을 제시하고 그것을 당의 정책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예컨대 여성부에 이어 해양부까지 지키겠다면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난 국가채무(2002년 133조6000억 원, 2007년 302조 원)는 어떻게 줄여 나갈 것인지 대안을 내놓았어야 한다.

실천의 방식이 따르지 못하는 ‘실천적 진보’는 실패한 좌파가 앞세웠던 민주 평화 개혁의 구호처럼 공허하다. 진보의 가치는 여전히 소중하다고 말하기 전에 그것이 서민과 중산층의 일상적인 삶을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는지, 실천의 방식으로 보여 줘야 한다.

‘발목잡기’로는 살길 없다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은 지난달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점차 좋아지고 있지만 그 속도는 충분히 빠르지 않고, 그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부유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혜택이 가난한 사람에게도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신(新)발전체제에서 그늘이 될 수 있는 분배와 복지, 열패자(劣敗者)와 탈락자, 양극화 문제 등에서 손 대표와 민주당은 시장과 효율의 보완자(補完者)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발목잡기’가 아닌 건강한 견제와 균형의 협력자로서 제 길을 찾아야 한다. 총선에 눈이 멀어 길을 잃으면 ‘실천적 진보’는 영영 멀어질 것이다.

전진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