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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의 만화방]한국적 스릴러 새 場연 ‘독한 만화’

입력 | 2008-02-23 02:59:00


대한민국 만화대상 ‘이끼’

윤태호의 ‘이끼’는 독한 만화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무료 만화가 판치는 세상에 유료 웹진에 연재한 것도 그렇고, 상대적으로 낮은 대중적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만화대상을 수상한 것도 그렇다. 시도도 평가도 독했지만 작품의 면면은 더 독하다. 지면을 꽉 채운 회색톤의 음침한 기운, 카메라 흉내라도 내는 듯 섬세하게 처리된 연속 컷, 해맑은 표정으로 흰자위를 번득이는 등장인물, 대사보다 독백이 더 많은 전개 방식 등으로 쉴 틈 없이 독자를 압박한다.

무엇보다 이 만화의 독한 맛은 주인공 설정에 있다. 현대 극화의 전형은 주인공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있다. 순서도 정해져 있다. 타고난 재능을 지닌 긍정적인 인물을 등장시킨다. 사건이 발생하고 동기를 부여한다. 노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또 다른 사건을 만든다. 인물에게 더 큰 능력이 필요해진다. 이때 작가의 의도에 따라 독자가 반응한다. 독자는 인물에게 더 큰 능력을 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허무맹랑하게 과장된 것이라도 작품 속 현실로 인정하겠다는 합의 단계다. 이 뒤부터 작가는 자유롭게 지상 최고의 인물을 만들어 간다. 그것이 한국 제일의 요리 실력을 가진 야채 장수일 수도 있고, 프리미어리그급 축구 실력을 지닌 중학생일 수도 있다. 모두가 공감했기에 믿기지 않는 능력을 지닌 인물에게 감동하는 것이다.

반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정반대편에 서 있다. 작은 회사의 총무였던 류해국은 자신의 장점이라고 믿었던 세심한 분석 능력과 원칙주의적인 성격으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나고 아내와도 헤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홀로 살던 아버지의 부고를 접한다. 상을 치르기 위해 외진 시골에 온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의심하고, 확인하려 하고 그것 때문에 모든 걸 다 잃고서도’ 주인공은 자신의 저주받은 능력을 앞세워 마을 사람들과 대립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버려야 할 능력,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능력을 발휘한다. 독한 주인공의 결벽증은 극의 긴장과 공포심을 최고조로 이끈다.

독자는 주인공의 안쓰러운 처지에 공감할 뿐 주인공의 능력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물론 작가의 의도된 설정이다. 주인공은 삶의 변화를 꿈꾸면서도 늘 같은 질문에 싸여 있다. 질문이 같기 때문에 답도 한결같다. 변화할 수 없으니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작가는 저주받은 주인공을 그리기 위해 독자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변화의 동력을 과거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주제를 전한다. 주인공이 변화에 실패하고 있는 것과 달리 작가는 전형적인 주인공, 관습적 연출과 서사, 평면적 작업 방식을 버리고 독하게 새로움을 추구함으로써 작품의 주제만큼이나 거대한 성취를 얻었다. 특히 가족으로부터 소외받은 사람들과 외딴 마을이라는 공간의 긴장감은 한국적 스릴러물의 새로운 전범이 아닐까.

박석환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