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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54년 나세르, 이집트 총리 취임

입력 | 2008-02-25 02:50:00


혁명은 참호 속에서 잉태됐다. 제1차 중동전쟁. 사령부는 그가 지휘하는 부대를 기억조차 못하는 듯했다. 총알도 나오지 않는 낡은 소총으로 이스라엘 군의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아랍의 진정한 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부패한 권부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숙적과의 전쟁을 통해 총부리를 내부로 돌려야 함을 깨달았다.

자말 압둘 나세르.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생 시절부터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34세의 젊은 장교는 1952년 이집트혁명을 통해 국제 무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2년 뒤 오늘, 나세르는 상관이자 정적인 나기브 대통령을 가택에 연금하고 총리가 되면서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방은 이집트의 혁명장교를 풋내기 정도로 취급했다. 하지만 그는 유럽의 석유 수송로였던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열강의 허를 찔렀다.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은 즉각 수에즈운하를 ‘탈환’하기 위해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전쟁)을 일으켰지만 나세르는 미국과 옛 소련의 외교적 지원에 힘입어 운하소유권을 인정받는 정치적 승리를 이뤄 냈다.

나세르가 보여 준 탁월한 실리외교는 중동은 물론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제2차 중동전쟁은 유럽 식민주의의 종언과 미국의 중동 진출을 가져왔으며 ‘나세르주의’의 탄생을 의미했다.

나세르주의는 범아랍 민족이 통합해야 한다는 정치적 이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여기에 미국과 옛 소련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적극적 중립주의를 표방했고, 무신론과 계급 투쟁을 거부하는 변형된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또 석유가 무기로 기능할 수 있다는 자각을 일깨웠다.

실제로 나세르는 유고슬라비아와 인도를 포함한 제3세계 국가들을 껴안으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지도자로 부상했고, 아랍 통합의 기치 아래 시리아와의 합병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알라의 축복은 거기까지였다. 1961년 시리아 군부는 이집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라크의 카셈 정권도 이집트에 반발했다.

더욱이 나세르주의는 민족통합이라는 구호 아래 제국주의의 구태에 빠져들고 있었으며 나세르는 독재정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수많은 비판적 지식인을 사막의 수용소로 보냈다.

나세르의 실험은 절대 권력의 말로를 다시금 보여 줬다. 하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는 지금도 아랍 민족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