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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김병관 선생, 언론자유 수호 등에 기여

입력 | 2008-02-25 13:46:00


화정(化汀) 김병관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은 1934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58년 고려대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8년 중앙대에서 신문방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광고, 판매, 총무국 등 여러 부서에서 근무했으며 1985년 부사장으로 승진해 1987년 발행인을 맡았다. 이어 1989년 사장, 1993년 회장, 2001년 명예회장으로 취임했다.

1990년 한국신문협회 회장을 맡아 한국 언론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4년간 활동했다. 1999년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 선임됐고 2005년에는 상임 고문을 맡았다. 2005년엔 한국디지털교육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언론자유 수호와 교육 문화 발전에 기여

김 전 명예회장은 반평생을 동아일보와 함께 했으며 동아일보의 창간이념인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는 그의 경영철학의 확고한 바탕이 됐다.

일민(一民) 김상만 선생에 이어 1987년 동아일보 발행인이 된 김 전 명예회장은 한국의 대표적 언론으로서 동아일보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한국사회의 급속한 다원화 속에서도 민주, 자유 언론으로서 동아일보의 위상을 훌륭히 지켜냈고 동아일보의 창간이념이 새로운 지식 정보화의 사회 환경 변화에 어울릴 수 있도록 편집과 제작 체제를 보완, 발전시켰다.

군사독재 시절 동아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자들은 끊임없는 감시와 검열을 받았다. 그러나 김 전 명예회장의 격려와 탁월한 지도력에 힘을 얻은 동아일보는 결코 굽히지 않고 진실만을 보도했다.

발행인 취임 첫해인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동아일보가 보도하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한국 민주화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다.

한국신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언론자유 수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많은 행사를 개최했고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사례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1999년 3월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에 취임한 뒤에는 한국의 21세기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혁신적인 개혁 작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법인 내에 학교발전위원회를 둬 향후 발전 방향과 구체적인 실천계획 등을 마련하고 실행해 옮겼다.

2005년 고려대 개교 100주년에는 건축 학술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대표적으로 100주년 기념관 건립, 국제학술회의 개최, 자매결연 대학 및 세계 유명대학 초청 교류확대 및 유대강화, 통일에 대한 학술회의 및 교류, 고려대 100년사 편찬 등이 있다.

환경파괴 문제가 지구촌의 현안으로 부상하자 김 전 명예회장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환경보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그린스카우트’ 운동을 주창했다. 동아일보와 맑은물되찾기운동연합회는 1994년 그린스카우트를 공동 창설했고, 이 단체는 청소년들이 중심이 돼 400만 명의 회원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다.

현재 그린스카우트는 한국에서 환경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설립한 김성수 선생의 뜻을 기리고 세계 평화와 인류문명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동아일보와 고려대는 1987년 인촌기념강좌를 개설, 공동 주최해 오고 있다.

김 전 명예회장은 인촌기념강좌에 세계 지도자를 초청하는 데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인촌강좌에서 강연을 한 세계 명사로는 호소가와 모리히로 전 일본 총리,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총리,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등이 포함돼 있다.

인촌기념강좌는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강좌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세계 지도자들을 초청해 그들의 지혜와 비전을 한국 국민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김 전 명예회장은 또 다양한 문화 영역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국악 진흥에 깊은 관심과 열의를 보여 왔다.

1989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한 후 ‘완창 판소리 발표회’ 등을 주최, 국악 발전에 기여했고, 1990년에는 창극 아리랑을 소련의 모스크바 등 9개 지역에서 순회 공연해, 재소 교포들의 민족애와 나라사랑을 고취시켰다. 그의 이런 공로를 기려 한국인간문화재진흥회는 1999년 1월 감사패를 전달했다.

다방면에서의 탁월한 업적과 외국국가 및 기관과 관계 증진에 대한 공헌을 높이 평가해 호주 모나쉬대는 1997년 김 전 명예회장에게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남북 관계개선을 위한 선구자적 역할과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기여

김 전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중국 리펑(李鵬) 총리와 단독 기자회견을 가졌다. 한국 언론 사상 중국 최고위층 인사와 첫 단독회견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많은 언론사가 추진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발행인이 직접 외국의 국가원수를 방문, 취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당시 김 전 명예회장은 이 총리로부터 “장쩌민(江澤民)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 제3세대로 권력교체가 완료됐다”는 발언을 이끌어내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중국 권력 체제 윤곽을 확인하는 특종을 했다. 또 “남북 직접 대화와 남북 평화정착을 위한 모든 조치를 지지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남북 당국간 접촉이 거의 없던 1998년 10월에는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의 공식 초청을 받아 동아일보 기자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이로써 그는 북한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남측 신문 경영인이 됐다.

방북기간 동안 김 전 명예회장은 남북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다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했고, 북한이 금강산을 관광특구로 지정해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의 장 등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또 남북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대해야 함을 강조하고 현 단계에서는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하는 것이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는 최선책임을 역설했다. 많은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한반도와 동북아에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에 망설임 없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다한 것이다.

한반도의 번영과 영구적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는 2000년 21세기평화재단 및 평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설립기금으로 사재(私財) 10억 원을 출연하기도 했다.

세계 각국과 교류 증진에 노력

동아일보는 1970년 영국의 더타임즈와 처음으로 제휴 관계를 체결했다. 1987년 김 전 명예회장이 동아일보 발행인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미국 뉴욕타임스와 일본 아사히신문 등과 협력의 폭을 넓혀갔다.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 관계를 맺은 1990년 동아일보는 러시아 이즈베스티야와 제휴 관계를 체결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 관계를 맺자 김 전 명예회장은 곧바로 베이징을 방문해 인민일보와 공식적인 제휴 관계를 맺었다. 1995년에는 호주의 시드니모닝헤럴드와 제휴 관계를 체결했다.

동아일보는 이런 제휴 관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행사를 개최해 국가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공헌해 왔다.

1994년 8월 동아일보와 인민일보는 ‘21세기 공자 사상’이라는 제목의 국제심포지엄을 공동 개최했으며 양국의 석학들이 참석해 21세기 공자사상의 역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같은 해 김 전 명예회장은 동아일보 인민일보 아사히신문 등 한중일 3국의 대표 언론사가 공동으로 1995년 서울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95년 8월1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는 ‘21세기 동북아시아’를 주제로 3사가 개최한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제안자로서 그는 성공적인 심포지엄 개최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으며 심포지엄은 3국간 이해 증진과 지역 평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 1997년에는 일본 교토에서 국제심포지엄 ‘21세기의 동아시아를 구축한다’가 3사 공동주최로 열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위한 노력도 남달랐다.

그는 올림픽과 같은 세계적인 행사를 통해 한국을 알리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1988년 올림픽을 한국이 개최할 수 있도록 세계올림픽위원회를 설득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의 공로를 기려 한국아마추어스포츠협회에서는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했고 한국 정부는 199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주변 국가와 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인식한 김 전 명예회장은 서울 올림픽 기간동안 러시아의 볼쇼이 발레단을 초청해 공연을 가졌다. 당시에는 한국과 러시아가 외교 관계도 없을 때였다. 볼쇼이 발레단 공연을 계기로 각종 문화행사가 잇따랐으며 결국 양국이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1998년 터키에 강진이 발생해 1만80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생겼을 때 김 전 명예회장은 터키가 한국전쟁 당시 1만4000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3600명의 터키군이 죽거나 부상했음을 상기시키며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동아일보는 타국의 국민을 위해 전국적인 돕기 운동을 최초로 시도한 한국 신문이 됐다. 터키돕기 운동은 형제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은혜를 갚는 기회가 됐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민들의 세계 시민의식을 높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술레이만 데미렐 터키 대통령은 친서를 보내 “동아일보의 터키 돕기 운동이 터키와 한국 국민의 우정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다”며 “터키 국민을 대신해 이 친절하고 뜻 깊은 돕기 운동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위한 노력

김 전 명예회장 일가와 일본 와세다대는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김 전 명예회장의 조부인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은 1914년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김 전 명예회장의 엄친이신 일민 김상만 선생도 1940년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했고 1985년에는 와세다대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1999년 김 전 명예회장의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취임식에는 와세다대 오쿠시마 다카야스 총장이 직접 참석해 축사를 했다. 선친들의 와세다대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김 전 명예회장은 고려대와 와세다대 간의 학문적 교류 증진을 위해 힘써왔다.

1997년 7월에는 와세다대 내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설립을 축하하며 1920년부터 발간된 동아일보를 마이크로필름과 축쇄판으로 기증하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동아일보 축쇄판을 보내줄 것을 약속했다.

김 전 명예회장은 한일 관계는 일제식민시대와 같은 불행했던 과거보다는 상호 협력과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사고를 견지하고 학술, 문화, 스포츠 등 각 분야에서 양국간 관계 증진과 교류 확대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95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 ‘21세기의 동아시아’와 1997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21세기의 동아시아를 구축한다’를 동아일보, 아사히신문, 인민일보 3사가 공동 개최해 동아시아 3국간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1999년 김 전 명예회장은 일본의 유명한 한국계 도예가 심수관 씨를 한국으로 초청해 ‘400년만의 귀향’이라는 제목의 도예전을 갖도록 지원했다.

당시 개막식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양국의 귀빈들이 참석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심 씨 일가는 지난 400년간 가업을 이어왔으며 일본의 도자기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도예전이 서울에서 개최되면서 한국과 일본 국민들이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김 전 명예회장은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가 한일 관계에 새로운 협력의 장을 열어줄 것을 기대하며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위해 동아일보 내에 ‘2002년 월드컵 대책본부’를 설립했다. 1996년 공동개최가 확정되자 그해 9월 아사히신문과 ‘2002년 공동위원회’를 발족해 각종 공동개최 기념사업을 전개했다.

물적 기반 마련…충정로사옥, 동아미디어센터, 안산공장 준공

김 전 명예회장은 동아일보를 종합미디어그룹으로 육성하기 위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노력했다.

충정로사옥 건립은 ‘제2의 창간’을 기약하며 일으킨 대역사로 기록된다. 국제화 정보화 생활화 시대에 맞춰 국민과 독자의 다양하고 고도화된 정보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작 공간을 조성하자는 취지였다.

충정로사옥은 나름대로 시대적 필요에 따른 역할과 기능을 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정신적 본사는 광화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생각이었다.

김 전 명예회장은 1990년 1월 16일 열린 충정로사옥 기공식 식사에서 “우리의 목표는 광화문의 거점에 동아일보의 웅지를 담은 새 사옥을 건립하고 그 건물에 상응하는 한국 언론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일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제2 광화문사옥 시대를 열기 위해 동아미디어센터 건립이 추진됐다. 동아미디어센터 건립은 동아일보의 창간정신과 ‘민족 민주 문화주의’라는 사시를 계승 발전시켜 국내 정상신문의 자리를 더욱 튼튼히 하고 궁극적으로 21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미디어그룹으로 성장해 나가자는 뜻이 담겨있다.

1997년 5월 기공식을 가진 동아미디어센터는 동아일보 사옥으로서 의미 외에도 미디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고 21세기 정보커뮤니케이션의 바람직한 앞날을 열어갈 중심 공간을 지향하는 건물이다.

특히 광화문사옥과 나란히 자리 잡은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광화문사옥이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짓자 ‘총독부를 감시해야 한다’고 했던 동아일보 창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선각에 따라 1926년 세워졌기 때문이다.

김 전 명예회장은 동아미디어센터 준공 기념사에서 “동아미디어센터의 준공으로 멀티미디어시대와 인터넷시대를 선도하는 첨단 신정보시스템과 ‘불편부당 시시비비’의 정신을 조화롭게 구현해 내 새천년에도 민족의 신문, 독자의 신문으로 헌신할 수 있는 우리의 터전이 완성됐다”고 강조했다.

동아미디어센터 3, 4층에는 국내 최초의 신문박물관이 들어섰다. 지난 한 세기의 한국 언론사와 그에 비친 영욕의 현대사, 정보통신 발전에 따른 미래 언론의 모습 등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언론에 대한 교육장 및 정보센터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

김 전 명예회장은 초고속 윤전시설을 도입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충정로 사옥 공장과 오금동공장, 대구공장에 이어 1997년 안산공장 준공으로 동아일보는 국내 언론사중 최대 용량의 초고속 윤전시설을 갖추게 됐다.

특히 안산공장의 경우 모든 인쇄과정이 전자동 컴퓨터시스템으로 작동되는 것은 물론 컬러 40면을 포함해 94면의 합쇄가 가능할 정도로 대용량이다. 독일 캐닉 앤드 바워 알버트 사가 만든 차세대 윤전기 3세트는 한 시간에 최고 44만 부까지 발행할 수 있는 초고속 시설이다.

이 같은 시설 확충은 더 커지고 다양해진 독자들의 정보욕구를 충족시키는 한편 지역적으로도 지방 독자들도 소외되지 않고 정보 전달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뉴미디어시대에 맞는 언론으로

김 전 명예회장은 동아일보를 뉴미디어시대를 이끄는 한국의 중심 언론으로 발전시켰다. 뉴미디어 시대에 맞는 ‘정보 민주주의’를 제창하고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정보 나눔의 사회’를 만드는 데 동아일보가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아닷컴(1996년)과 동아사이언스(2000년)를 설립해 이 같은 생각을 구체화했다.

또 ‘제2의 창간정신’으로 조간화와 가로쓰기라는 지면의 대변혁을 단행했다. ‘비판 동아’라는 정론지로서 장점을 유지하면서 지면의 다양화와 시각화라는 시대적 요청을 수렴한 결단이었다.

조간화는 선진국에서 대부분의 권위지들이 조간으로 발행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신문시장의 세계적 조류와 호흡을 같이하는 것.

김 전 명예회장은 1994년 조간화 1년을 맞아 발행인 제언을 통해 “‘열린신문’ ‘정직한 신문’ ‘정상의 신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1998년 김 전 명예회장은 전면 가로쓰기와 섹션신문으로 다시 한 번 변혁을 시도했다.

신문을 종합 섹션과 굿모닝 이코노미섹션, 굿모닝 스포츠섹션으로 구분해 독자들이 취향에 맞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

여기에 젊은 직장인과 여성독자를 위한 ‘굿모닝 미즈 & 미스터’를 섹션 속의 섹션으로 발행해 ‘젊은 신문’ ‘정보 신문’으로서 이미지를 한층 강화했다.

1995년 8월 14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 사옥 옥상에서 처음으로 빛을 발한 첨단 뉴스전광판 ‘D플래시’는 가로 12.48m, 세로 9.12m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국내 최초의 첨단 천연색 뉴스전광판 D플래시가 등장하면서 서울 광화문 네거리는 영상 뉴미디어시대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광화문을 지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24시간 살아있는 뉴스를 리얼타임으로 보고 얻을 수 있게 됐다.

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