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을 지켜보면서 옛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아들인다는, 이른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를 그토록 뼈저리게 절감한 적이 없다. 물론 직접적으로는 이 대통령이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로 떠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배웅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소회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35분여에 걸친 취임사를 들으면서 비로소 손에 잡힐 듯한 송구영신의 실체를 확인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떠나보냈는가. 소쩍새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밤새 울었다고 했는데, 우리는 무엇을 떠나보내기 위해 그토록 절치부심하였는가. 지긋지긋한 코드정치, 품위 없이 말하는 대통령, 편 가르기가 아니었을까. 이제 우리가 새롭게 맞게 되는 것은 선진화, 실용주의, 통합지향, 국민섬기기와 같은 것들임을 새 대통령은 힘주어 말했다.
그가 경제 교육 사회 기업 문화 등 각 영역에서 쏟아낸 각론들도 귀담아들을 만하지만, 선진화와 실용으로 특징지어지는 총론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 총론이야말로 국민이 오매불망 목말라했던 메시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건국 60주년이 되는 올해를 선진화 원년으로 삼으면서 대한민국 과거의 것들은 여지없이 털어 냈던 ‘교체형 어젠다’나 일부만 취사선택하는 ‘선별형 어젠다’가 아니라 산업화와 민주화를 아우르며 한 단계 비상할 것을 요구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형 어젠다’를 표방한 것도 마음에 와 닿는다.
‘이념서 실용으로’ 역사적 전환점
이전의 노 정부가 기를 쓰고 추진해 왔던 개혁이 교체형 선별형 어젠다였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불화가 싹텄는가. 국민과 불화하고, 시대와 불화한 정부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념의 잣대로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니, 사회 전체가 독수리처럼 날았던 그 도전정신을 어느새 잃어버리고 하류를 지향하게 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념과 코드에 염증 난 국민에게 실용의 시대를 열겠다는 메시지만큼 반가운 것도 없다.
그렇다면 ‘메시지’는 좋은데 그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는 믿을 만한가. 이 대통령은 끼니를 걱정하던 소년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했던 자전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것이 ‘올드보이’ 팔불출의 자랑으로 들리지 않고 믿을 만하게 들렸다면 국민영웅시대를 열자는 이야기에 진정성이 담겼기 때문이리라.
물론 메시지와 메신저가 믿을 만하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국민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국민을 섬기고, 국민에게서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약속은 아직까지는 약속어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국민은 기대에 차 있다. 그 기대는 마치 긴 겨울을 지낸 인동초(忍冬草)가 봄을 맞이할 때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서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이 시점에 대통령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대통령 자신이 정치는 국민을 섬기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위해 진력을 다할 것을 다짐했지만,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정치에는 본질적으로 어두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국정 책임자는 국민에게 환영받는, 이른바 ‘선역(善役)’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을 주고 욕을 먹는 ‘악역(惡役)’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막스 베버는 이를 두고 정치란 ‘악마와의 계약’이라고 했을까.
낙오자 보듬는 따뜻함 보여주길
아무리 국민과 격식 없이 소통하고 또 일류국가를 만들고자 해도 그 과정에서 희생과 괴로움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작고 효율적이며 일 잘하는 정부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고통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바로 이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불가피한 특성 때문에 변화를 요구하는 실용정치와 실용정책에도 밝음 못지않게 어두움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실적과 책임감, 효율과 일하기를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시대정신이지만, 그래도 따라오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을 배려하는 것이 따뜻한 정부다. 또한 이것이 작고 효율적이며 일 잘하는 정부에 ‘따뜻함’이 추가돼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앞으로 취임사에서 약속한 것들이 지켜져서 고대하던 새 시대가 열릴 것인지를 지켜볼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