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을 지난 후 방향을 틀어 동진하는 백두대간. 그러다 다시 대륙을 향해 북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경북 봉화의 산골짝에서다. 대간은 그 길로 태백산(1566m)을 지나 화방재 수리봉을 섭렵한 뒤 자동차로 오르는 가장 높은 고개 만항재(1330m)를 거쳐 강원 동남부의 최고봉 함백산(1572.9m)으로 치닫는다. 지금 선 곳은 만항재 고갯마루. 대간 마루금과 지방도 414호선 아스팔트 도로가 교차하는 1330m의 고지다. 남으로 영월의 상동, 북으로 정선의 고한과 사북. 험준한 산악이 바다의 파도처럼 대차게 밀려오는 ‘산의 바다’가 발 아래 펼쳐진다. 이제부터 할 일은 대간 마루금을 밟으며 그 안에 맥맥이 흐르는 이 땅의 정기와 기운을 느끼는 것이다. 함백산 정상을 오르려는 것이다.
백두대간 산악이라고 모두 험하지는 않다. 특히 이곳은 더더욱 그렇다. 만항재는 자동차로도 오를 수 있다. 여기서 빤히 보이는 함백산 역시 같다. 온 가족이 산보 삼아 오르내릴 수 있는 쉬운 코스다. 이 겨울이 가기 전, ‘크게 밝다’는 뜻의 함백(咸白)산의 백두대간 새하얀 눈길을 온 가족이 함께 밟아보는 것은 어떠할지.》
山 山 山의 바다 건너며 삶의 먼지를 턴다
○ 하얀 눈을 밟으며 기분 좋게 오르는 함백산 대간 마루
만항재 바로 밑 등산로 입구. 차 한 대가 지날 만한 포장도로가 산등성으로 이어진다. 함백산 정상 바로 밑에 들어선 무선국 기지까지 이어진 길이다. 이 도로를 따라 오르기를 50분쯤. 사북 고한의 산악 풍광이 도로 아래로 시원스레 펼쳐진다. 멀리 산등성을 뒤덮은 하얀 눈밭. 고한읍(정선군) 백운산 정상 아래로 들어선 하이원 스키장의 슬로프다. 그 왼편의 작은 봉우리에도 건물이 있다. 한때 스몰 카지노로 이용됐던 강원랜드의 하이원호텔이다.
도로 왼쪽 숲 속으로 등산로가 열린다. 대간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숲 속은 아직도 눈투성이다. 길을 벗어나 발을 디뎌 보았다. 무릎까지 푹 빠진다. 그러나 다져진 등산로는 걷기에 편하다. 아이젠 없이도 걸을 정도다. 능선을 향해 오른쪽으로 틀자 숲 밖으로 광활한 산경이 펼쳐진다. 대간 능선을 걷는다는 것은 이런 매력이 간직돼 있어 좋다. 저 멀리 산자락으로 새하얀 풍력발전기 여러 대가 보인다. 삼수령(동해 서해 남해로 흘러드는 오십천 한강 낙동강의 발원지가 깃든 산악·태백시) 근방의 백두대간 마루에 들어선 풍차다.
이곳의 대간 마루 등산로는 제법 가파르다. 그런데 등산로 왼편이 철망으로 가려졌다. 주목보호 철망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장생의 주목 군락지다. 말라 비틀어져 고사목처럼 보이는 주목 한 그루. 그러나 이 겨울에도 끄떡없이 살아 있다. 푸른 바늘잎이 그것을 말해 준다. 온통 눈밭을 이룬 급경사로를 오르자 다시 도로가 나타난다. 무선국 입구가 지척이다. 입구를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곧 함백산 정상이다. 고개를 떠난 지 1시간 20분 만이었다.
▲ 촬영 :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 대간 마루금을 따라 내려오는 만항재 하산 길
대간산악의 정상을 아직 한 번도 밟은 적 없는 분들. 꼭 한 번 오르기를 권한다. 대간 마루의 산정은 특별하기 때문이다. 함백산 정상을 보자. 정상 바로 밑 바위자락의 양지 녘은 그리도 포근하고 따뜻하다. 그러나 바위 서너 개를 계단 삼아 오르면 만나는 정상의 상황은 전혀 뜻밖이다. 매섭게 차갑고 폭풍처럼 세찬 바람이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다. 정신을 앗아가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발 아래 펼쳐지는 멋진 지상의 풍광이 그 하나다. 대간 마루의 정상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주변의 산악을 거느린 벽과 같은 존재이기에 그렇다. 함백산 역시 같다. 주변에 이보다 높은 봉은 없다. 그러니 오늘 여기에서만큼은 함백산 정상이 에베레스트 봉이 되는 셈이다.
하산 길. 갈 곳은 차가 세워져 있는 만항재다. 산행의 재미는 이제부터다. 내내 대간의 마루금을 따르기 때문이다. 마루금 산행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산줄기 양편으로 펼쳐지는 풍치를 두루 감상할 수 있어서다. 산행 내내 정상에 선 듯한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중턱 즈음에 이르면 한동안 가파른 경사로 내리닫이 한다. 그 길로 오르는 분들을 보면 안쓰럽다. 중간쯤에서 도로를 만나고 길을 건너면 다시 야트막한 구릉의 숲길로 인도된다. 설원 트레킹 코스로 손색없는 눈밭에서 뽀드득 소리가 무척 예쁘게 난다. 그리고 곧 만항재에 이른다.
조성하 summer@donga.com
▼ 고한의 어제와 오늘▼
폐광으로 내리막 치닫다가 휴양 리조트타운으로 우뚝
만항재는 고한 땅이다. 고한은 사북과 더불어 정선의 한 읍. 1940년대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광산기사가 개발차 찾았을 때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오지다. 땅 면적의 85%가 해발 700m 이상 고지이고 논은 예나 지금이나 한 뼘도 없다. 밭도 2% 미만이니 먹고살 일은 오로지 석탄 캐는 일과 화전 일구는 일뿐이다. 2000년 스몰 카지노가 오픈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 고한에서도 재 밑의 만항마을은 더하다. 만항재를 등지고 정암사로 내려가다 보면 그 마을을 지난다. 깊은 계곡은 ‘앞산과 뒷산에 줄을 걸어 빨래를 널 정도’다. 지붕 낮은 옛 탄광촌의 구옥 몇 채가 사라진 역사를 말해 준다. 이 계곡에는 크고 작은 탄광이 있었다. 그 흔적은 계곡을 흐르는 동남천에 고이 간직돼 있다. 바위를 벌겋게 물들인 철분이 그것이다. 석탄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1962년. 고한의 영화도 함께 시작됐다. 탄광 경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인구가 매년 20%씩 늘 정도였다. 최번성기인 1985년 고한의 주민 수(3만2800명)가 잘 말해 준다. 그로부터 20년 후(2004년)에는 17.5%(5755명)로 급감한다.
고한의 석탄 생산량은 엄청났다. 20여 개 탄광이 전국 생산량의 15%를 파냈을 정도다. 그때 고한에 붙은 별명이 ‘삼탄공화국’이다. 삼탄이란 ‘고구마탄맥’(고구마 줄기처럼 계곡에 줄줄이 이어진 석탄 탄맥을 이름)의 고한 산골짝에서 탄광을 개발했던 삼척탄좌를 말한다. 탄광 쇠퇴의 원인은 아파트였다. 무연탄 수요가 줄자 정부는 폐광을 뼈대로 한 ‘석탄산업합리화사업’을 선언(1989년)했고 그와 더불어 고한의 탄광 경제는 무너졌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 폐광 조치로 백척간두에 내몰린 고한 주민은 생존권 사수를 위해 뭉쳤고 그 노력으로 고한은 새로운 모습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해 또다시 돈과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다. 2000년 박심 지구에서 문을 연 내국인 출입 스몰 카지노 덕분이다. 카지노의 파워는 대단하다. 손만 대면 금으로 변했던 미다스의 손을 연상시킨다. 함백산 정상에서 보이던 백운산의 하이원 스키장이 그 한 예다. 이제 고한은 탄광촌이 아니다. 종합 휴양 리조트타운으로 변했다.
이런 변화를 1300여 년 전 예견한 사람이 있다. 동남천이 흐르는 계곡에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다. 산속에 수마노탑(보물)을 짓고 당나라에서 친견한 문수보살로부터 전수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한 스님은 이렇게 예언했다고 한다. ‘이곳에 하얀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고한 주민들은 하이원 스키장을 두고 스님의 이런 신통한 예지력을 내내 말한다. 그러니 함백산을 오르고 만항재를 들렀다면 정암사와 하이원 리조트에도 꼭 한 번 들를 만하다.
조성하 summer@donga.com
○ 여행정보
◇찾아가기=영동고속도로∼만종분기점∼중앙고속도로(제천·안동)∼제천나들목∼국도 38호선∼제천∼영월∼사북∼고한∼지방도 414호선∼정암사∼만항마을∼만항재.
◇함백산 눈길 트레킹 ▽코스=만항재∼등산로 입구∼주목 군락∼무선국 입구∼함백산 정상(여기까지 3.5km)∼대간 능선∼도로∼숲길∼만항재(전체 6.8km). ▽장비=아이젠, 등산화, 장갑과 모자, 방한복. 정상까지 1시간 20분 소요.
◇여행상품=3월 1, 2일 서울 출발 버스투어. 만항재∼함백산 눈꽃 트레킹. 2만9000원(점심 포함). 승우여행사(www.swtour.co.kr), 02-720-8311
▲ 촬영 :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 촌두부 감칠맛에 반하고… 영월메밀찐빵 향기에 취하다▼
함백산은 태백과 정선, 영월의 꼭짓점이다.
산을 내려와 서울로 가는 길. 고한 사북을 거치는 국도 38호선도 좋지만 화방재를 경유해 상동(영월)을 지나는 국도 31호선 루트를 권한다. 영월 산골짝의 시골 맛집을 찾을 수 있다.
◇맷돌촌두부(주인 라병선)=상동의 국도 31호선 길가에 있는 시골집의 촌두부 식당. 명함에 ‘직접 농사지어 손으로 만든 웰빙 식품’만 낸다고 돼 있다. 두부는 남편 라병선 씨가, 김치 된장 청국장 등의 음식은 안주인 오선희 씨 솜씨다. 이북이 고향인 라 씨는 상동에서 두부공장을 했던 부친을 돕다가 두부장인이 됐다.
식당이자 거처인 집 주변은 온통 밭이다. 해거리를 하는 콩만 해거리 해에 사다 쓸 뿐 콩을 비롯한 모든 야채를 직접 키워 쓴다. 배추 무 고추 옥수수 등등. 된장 청국장도 물론 직접 띄워 만들고 순두부찌개의 간장 역시 직접 담근다. 상차림에서 최고 인기 메뉴는 땅속에서 바로 꺼낸 김장김치와 동치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구수한 모두부와 맛의 조화를 이룬다. 메뉴는 모두부와 두부전골, 순두부 된장 청국장찌개. 메밀국수(모두 5000원). 콩비지는 덤이다. 연중 무휴, 오전 9시∼오후 9시 개점. 영월군 상동읍 내덕리 245-1, 033-378-2904
◇영월메밀찐빵(주인 김완중)=영월의 또 다른 시골 맛집. 국도 38호선 영월과 제천 사이 쌍룡리(영월군 서면)의 ‘영월랜드’(노변휴게소)에 있다. 메밀가루를 섞어 반죽한 만두와 찐빵을 직접 쪄내는 식당인데 보리 쑥 흑미 옥수수를 가미한 찐빵도 낸다. 특히 쑥 찐빵은 어머니 조명행(68) 씨가 봄에 직접 뜯어 냉동 보관한 것으로 만드는데 그윽한 맛과 향이 일품이다. 찐빵 네 개 2000원, 25개들이 한 상자에 1만 원. 휴일 없이 오전 9시∼오후 9시 개점, 택배(입금계좌 농협 311018-061671) 서비스도 한다. 영월군 서면 쌍룡리 568-3, 033-372-1192
영월=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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