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1호 숭례문이 불에 탄 2월 10일. 대학생 최세정(21) 씨는 그 주에 한 통의 e메일을 받았다. 일본에서 온 e메일에는 영어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숭례문 화재 소식 들었어. 정말 유감이야. 넌 괜찮아? 일본인인 나도 마음이 아픈데 넌 얼마나 슬프겠니. 어서 힘을 내. 그리고 복원 잘됐으면 한다. 일본에서, 언니가.”
최 씨가 얼굴도 모르는 ‘일본 언니’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지난해 말부터였다. 한중일 다중 커뮤니티 사이트 ‘3asian’에서 펜팔로 만난 이들은 5인조 그룹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공통점을 발견하고부터 급속히 친해졌다. 아는 거라곤 서로의 소개 글이 전부였지만 이들은 1년도 채 안 돼 서로 위로하는 사이가 됐다. e메일로 시작한 펜팔이지만 가끔씩 편지지에 직접 쓴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다. 급기야 최 씨는 3월에 일본 오사카에 직접 날아가 처음으로 ‘만남’을 가질 예정이다.
386세대에게 익숙한 문화 중 하나인 ‘펜팔’. 과거 최신가요 책이나 연예잡지 뒤편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펜팔 구함’ 코너가 모니터 속으로 들어갔다. 책이 아닌 ‘펜팔 사이트’를 통해 상대를 찾는 이른바 ‘디지털 펜팔’ 시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고 있다.
▲ 촬영 : 박영대 기자
○ 모니터 속으로 들어간 펜팔… 전문사이트 수십여개
최근 취업에 성공한 직장인 김윤아(26) 씨. 그 누구보다 “축하한다”며 기뻐해 준 사람은 바로 일본인 아리히코 하세가와(32) 씨였다. 2년 전 해외 펜팔사이트인 ‘펜팔 월드’에서 만난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는 바로 ‘페루 여행’이었다. 여행에 대한 경험을 e메일로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고 이제는 생일, 기념일까지도 챙긴다. 2006년 여름에는 서울을 찾은 하세가와 씨를 위해 김 씨가 관광 가이드로 나서기도 했다. 김 씨는 “취업, 결혼 문제 등 나와 같은 고민을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그런 김 씨의 요즘 최대 고민도 하세가와 씨 일이다. “며칠 전 자살하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다”며 “‘당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얼마나 아끼는 줄 아느냐’며 긴 답장을 보냈다”고 말했다.
현재 인터넷에는 국내외 펜팔 전문 사이트가 수십 개에 이른다. 회원 수 2만1000명을 자랑하는 펜팔 사이트 ‘체리우체국’의 운영자 배상준(24) 씨는 “지난해만 해도 신규 회원이 매달 60명 정도였지만 올해 들어 평균 200명 정도로 급증했다”고 말했다. 회원 수 1만 명 이상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 펜팔 동호회도 10여 개나 된다. 한 포털 사이트 내 동호회인 ‘우리들을 위한 펜팔마을’의 경우 설립 1년 만인 현재 회원이 4만6000명이나 된다. 회원들은 10대의 중고등학생부터 30대 주부, 40∼50대 중년층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인터넷 펜팔 사이트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찾는다. 예전에 책을 뒤져 한 명 한 명 상대를 찾던 것과는 달리 원하는 국가와 연령, 관심사, 소개 글 등 분류 작업을 거쳐 상대를 고른다. 디지털 시대인 만큼 e메일을 주고받지만 최근에는 손으로 쓴 편지, 이른바 ‘스네일(달팽이·그만큼 연락이 느리다는 뜻) 메일’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찾을 수 있다.
○ 느긋한 기다림이 미학…실시간 통신수단 사용안해
단순히 e메일로 대화를 나누는 ‘e메일 친구’가 연락 수단에 초점을 맞췄다면 디지털 펜팔족(族)은 ‘문화’를 나누며 서로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기를 바란다. 이로 인해 ‘한류’나 어학, 유학, 문화 차이 같은 것들이 대화의 핵심 주제가 된다. 특히 디지털 펜팔족 중 상당수가 유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어 ‘홈 스테이’로 인연을 이어 가기도 한다.
또 편지 안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도 한다. 4년째 미국인 동갑내기 대학생 알렉스와 편지를 주고받는 대학생 손지현(20) 씨는 “얼마 전 알렉스의 여자친구가 나와 전공(패션디자인)이 같은 걸 알고 새롭게 펜팔을 맺었다”고 말했다.
이들에게는 휴대전화나 메신저, 인터넷 채팅 등 실시간 통신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불문율처럼 굳어져 있다.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다작’ 인연보다 ‘장수’ 인연. 펜팔 동호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는 10년 이상 된 장수 펜팔족들이 남긴 ‘노하우’ 글들이다. 편지지 고르는 법부터 나라별 필수 에티켓, 심지어 답장 안 올 때 기다리는 법 등 다양하다. 12년째 노르웨이 친구 안나(50) 씨와 스네일 메일을 주고받는 황경미(49·교사) 씨는 “펜팔은 연애와 같다”며 “한때 불타오르는 감정이나 횟수에 연연하지 않고 상호 존중하며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펜팔의 핵심은 바로 ‘기다림’의 즐거움에 있다. 쉽게 맺고 쉽게 끊는 디지털 소통 시대에 이들은 아날로그적 인간관계를 그리워하며 기다림을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는 것이다.
서울대 서이종(사회학) 교수는 “현재의 펜팔 문화는 기다림을 선택하고 이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만든 문화”라며 “끈끈하고 인간적이던 과거의 아날로그적 기다림을 즐기는 것은 ‘인스턴트’화된 소통에 대한 소리 없는 반작용”이라고 말했다.
혹시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위해 저 멀리서 정성스레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펜팔 고수들이 전하는 펜팔 장수 비법 :
한 번에 너무 많은 글이나 사진을 보내지 말라
문법에 얽매이지 말고 개성 있는 문장으로 시선을 끌어라
질문을 자주 하되 꼬치꼬치 캐묻지 말라
어학이나 유학 등 펜팔의 목적을 너무 내비치지 말라
연락이 끊겼다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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