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전파였나 인디언 침탈이었나
《최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재검토되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식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고, 이는 신대륙에 대한 ‘구원’이라는 것이 주류였다. 즉 미개한 원주민밖에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의 문명을 전해주고 원주민의 삶을 향상시켰으며, 이것이 오늘날 가장 발달된 문명의 중심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의 생각은 이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콜럼버스의 도착을 ‘침략’이자 ‘약탈’의 시작으로 본다.
자신의 문명과 역사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자신의 땅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화되고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었으며, 서양 문명은 이러한 희생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먼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과정을 살펴보자. 대서양 연안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앞 다투어 신대륙 발견에 열을 올린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 무역이 부활해 향료, 비단, 보석과 같은 동방 물산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동양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출판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황금의 나라 지팡구(일본) 등에 관한 이야기는 동방에 진출하고자 하는 유럽인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인도는 황금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귀하고 값비싼 향료가 넘쳐흐르는 꿈의 나라로 여겨졌다. 당시 유럽의 웬만한 모험가라면 인도에 가서 벼락부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튀르크가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탓에 유럽에서 동방으로 가는 길을 차단당한 무역상인들 역시 인도로 가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야 할 필요에 직면했다. 기술적으로는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지리 지식과 항해술의 발달하였고, 토스카넬리는 지구 구형설을 주장하여 인도 항로의 발견과 세계 일주에 이론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하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인도에 갈 결심을 한 후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을 찾아갔다. 항해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 후원자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에스파냐는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을 두고 포르투갈과 경쟁하고 있었기에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후원자로 나선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에 제1회 항해를 시작하여,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의 어느 섬에 도착하여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이곳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귀국 후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된 그는 17척에 1500명의 대선단을 이끌고 2차 항해를 떠났다. 그는 그곳에 여왕의 이름을 딴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인디언들을 동원하여 금을 채굴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인디언을 살육하고 노예화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황금 대신 노예가 본국으로 보내졌고, 콜럼버스는 문책을 당했다. 3차, 4차 항해도 별 소득이 없었다. 1504년 이사벨라 여왕이 죽은 후 콜럼버스의 지위는 더욱 하락했다. 결국 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잊혀진 인물이 되어 죽는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도라고 믿었다. 그가 발견한 서인도 항로 덕분에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반면에 인디언들에게는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에스파냐는 중앙·남아메리카에서 대규모의 금 은광을 개발해 막대한 양의 귀금속을 유럽으로 가져왔다. 1520∼1860년에 에스파냐에 수입된 은은 1만8000t나 되었으며, 금도 200t이 넘었다. 당시 유럽의 화폐는 금화나 은화였다. 하지만 금은이 좋은 일만을 만들지는 않았다. 귀금속이 대량으로 유입되자 유럽의 화폐 가치는 곧바로 하락하였고, 이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럽의 물가는 16세기 동안에 평균 2∼4배 올랐는데, 이것은 당시로 볼 때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가격혁명(the price revolution)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가격혁명은 임금 노동자나 고정된 지대로 생활하는 지주에게는 불리했으나, 상인이나 수공업자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여 이들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해외시장은 상업혁명을 일으켜 시민 계급과 자본주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이와 함께 무역의 중심지가 대서양으로 이동하여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고 대서양 연안 국가들이 번영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유럽인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동양의 산물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신대륙에서 담배, 코코아, 감자 등이 수입되었다. 새로 생긴 넓은 시장을 토대로 유럽의 상공업과 금융업도 급속히 발전했다. 결국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신항로 개척으로 연결되었고, 이것은 지구상의 여러 지역과 문명이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맺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성립된 의미 있고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서유럽의 관점에서 신대륙 발견과 정복을 해석한 근대화론적 시각에 가깝다. 이는 인디오의 역사를 문명 이전의 야만적이고 미개한 것으로 치부하여 에스파냐의 문명이 원주민 아메리카에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는 서구 중심적인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반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아메리카의 역사를 야만적이고 미개한 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명을 지닌 자랑스러운 과거로 인식한다. 이들에게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은 원주민 학살, 환경 파괴를 가져온 재난의 시작이었을 뿐이며, 현재까지 계속되는 중남미의 가난과 저발전의 원인이기도 하다.
신대륙 발견 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타의에 의해 사회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인구의 급속한 감소다. 인구가 감소한 것은 유럽인들의 잔혹한 살육과 약탈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구인들을 통해서 들어온 각종 전염병이었다. 천연두를 비롯한 유럽에서 옮겨진 질병 때문에, 신대륙 발견 이후 100년 동안에 원주민 인구의 90% 이상이 사망하였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가 ‘콜럼버스의 날’로 지정된 10월 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꾼 것은 콜럼버스의 발견에 대한 원주민의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콜럼버스와 그 뒤를 이은 외국 정복자들은 히틀러보다 더 잔인한 살육행위를 저질렀다.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을 초래한 이 날을 기념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며 콜럼버스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학살’을 자행한 인물이기에 중남미인들은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차베스는 TV·라디오 연설을 통해 “1492년 콜럼버스 상륙 당시 1억여 명이던 대륙 원주민 수가 불과 150년 만에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면서 “정복자들은 10분에 한 명꼴로 원주민을 죽인 셈”이라고 규탄했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원주민에게 구원이 아니라 침략과 희생의 역사인 것이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
:심화학습:
위 글을 참고하여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살펴보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관하여 토론해 보자.
▼콜럼버스보다 1세기 이전 중국에선▼
정화의 남해원정단 62척 선단끌고 동남아 순방
明국위선양-교역목적… 상대국 주권-풍습 존중
서양에 콜럼버스를 필두로 하는 신항로 개척이 있었다면 동양에서는 그보다 1세기 정도 앞선 정화의 남해원정이 있다. 정화의 원정은 중국의 명나라 때에 총 7회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제1차 항해는 영락3년(1405)에 있었다. 당시 정화가 거느린 선단의 규모는 거선 62척, 승무원 2만 7800여 명이었다. 거선의 크기는 길이 150m, 너비 62m로 현재의 8000t급에 해당한다. 1493년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 때 탔던 배가 120t에 불과했음을 볼 때, 선박의 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정화 원정대의 주된 목적은 명나라의 국위를 외국에 과시하여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게 하는 데 있었다. 종주국이라고 해서 내정을 간섭하는 것은 아니고 명목상 신종관계를 맺고 그 나라에 한하여 무역을 허용하는 방식이었다. 정화는 정박하는 나라마다 이러한 기본 방침을 설득했으며, 대부분의 나라는 신종관계를 맺는 국서를 제출하고 교역을 하였다.
명나라가 주로 수출한 상품은 도자기, 비단이었다. 정화가 구입한 외국 물품에는 후추, 용연향, 진주, 산호 등을 비롯하여 사자, 표범, 타조 등 진기한 짐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비중이 컸던 물품은 후추로 상당량이 거래되었다.
정화의 항해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영락제가 황제가 되면서 행방불명된 건문제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당시 동남아시아 각국에는 화교(華僑)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건문제가 동남아 지방으로 탈출하여 영락제의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사전에 막으려 한 것이다. 이처럼 정화의 7회에 걸친 대항해의 목적은 국위 선양, 교역 촉진, 건문제의 행방 추적이라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항해 도중에 무력 충돌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3차 항해 때는 실론 왕이 명나라로부터의 책봉을 거부하여 전투가 벌어진 것이었다. 정화는 기습 작전으로 왕궁을 포위 공격하여 국왕을 포로로 잡았다. 실론 왕은 일단 명나라로 연행되어 왔다가 석방되었고 실론은 명나라와 신종관계를 맺었다.
1차 항해 때에는 수마트라의 팔렘방에서 충돌이 있었고, 자바섬의 내란에 끼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정화의 함대는 몇 가지 사건을 제외하고는 가는 곳마다 평화적이고 공평한 거래를 함으로써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고 그 지방의 풍속, 습관을 존중하며 우호 관계를 맺어 교역할 것을 청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나라가 우호관계를 맺고 국왕, 추장, 왕자, 왕족, 사절들을 정화의 함대에 탑승시켜 명나라를 방문하도록 했다. 영락 21년(1423) 정화가 6차 항해에서 귀환할 때는 무려 1200명이 넘는 각국 사절과 상인이 남경에 와서 교역을 하였으며 동남아 각국의 국왕도 남경을 방문하여 영락제가 주최한 성대한 환영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 원정으로 중국인들은 남해를 새롭게 인식하게됐으며,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사는 화교들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이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약 1세기를 앞선 것이었다.
김소현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