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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칼럼]대북 정책도 이젠 퓨전시대다

입력 | 2008-03-03 20:27:00


‘표지석 파문’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다. 남한 사회 같으면 남북 정상회담을 기념해 나무를 심고 그 옆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름의 표지석을 세우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지만 북한은 다르다. 김일성 일가(一家)에 관한 것이 아니면 어떤 형태의 조형물도 설치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김 부자 유일신(唯一神)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신’은 오직 김 부자뿐이므로 다른 조형물은 모두 우상(偶像)이 된다. 우상을 허용하는 ‘종교’는 없다. 그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250kg짜리의 거대한 표지석을 들고 갔으니 북한이 퇴짜를 놓을 수밖에. 줄이고 줄여서 다시 가져간 70kg짜리를 설치하도록 해준 것만 해도 북으로선 크게 배려한 것이다. 결국 북 체제의 특성을 몰랐기에 망신을 당한 것이다.

26일로 잡힌 2010년 월드컵 예선 남북한 평양 경기가 아무래도 무산될 것 같다. 북한이 태극기도 못 걸게 하고 애국가도 연주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하는 국가대표팀 간 경기(A매치)에선 반드시 참가국의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해야 하는데도 막무가내다. 상호주의 원칙에도 반한다. 우리는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를 비롯해 지금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북의 인공기 게양과 국가 연주를 허용했다.

‘태극기의 추억’ 지우고 싶은 北

북한으로선 난감할 터이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표징이다. 그런 태극기를 평양 하늘 아래 펄럭이게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북도 한때는 태극기를 국기로 인정했기에 더 곤혹스러울 것이다. 북은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개최한 ‘김일성장군 환영 군중대회’에서도 태극기를 게양했다. 태극기는 분단이 굳어지던 1947년 11월 김일성에 의해 인공기로 대체돼 북에서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주민들에게 ‘태극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겠는가.

표지석과 태극기 게양 논란은 북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한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북을 알고 이해하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표지석 파문만 해도 북의 우상화 수준을 알았더라면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을 들고 갔다가 그냥 되가져왔으니 창피스러운 일이다. 1회성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는 국가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다.

태극기 게양을 불허하는 북의 처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태극기를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면서까지 북을 배려하고 도와줘야 하는가.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북의 모든 대남전략이 대한민국의 존재 부정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해하되 어떻게 할 것인가. 적절한 행동을 통해 우리의 의도와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이를 관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태극기 게양 문제로 우리를 힘들게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경고음 정도는 울려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북이 당장 급한 게 비료다. 파종기를 감안하면 이달 중에라도 남북대화가 재개돼 늦어도 5월 중에는 비료를 넘겨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도적 지원’의 원칙은 지키되 양을 줄이거나, 인도(引渡) 시기를 늦추는 방법 등으로 유감을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쌀의 경우 세계식량계획(WFP)처럼 모니터링 능력이 있는 국제기구를 거쳐 간접 지원할 수도 있다. 예년처럼 30만∼40만 t씩 마구 퍼 줄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쌀 40만 t이면 1500억 원이 넘는데 다양한 지렛대로 활용해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실용적 대북 정책이기도 하다.

실용과 명분의 ‘칵테일 정책’을

지난 10년 동안 이런 노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주장을 펴면 수구 냉전세력으로 몰렸다. 그렇다고 나는 ‘당근과 채찍’ 식의 접근도 좋아하지 않는다. 진부하기도 하거니와 정책의 조합이 너무 단순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퓨전적 대북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동서양이 혼합된 퓨전요리는 포크와 젓가락을 함께 사용한다. 대북 정책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섬세하게 버무려져야 한다. ‘정책의 칵테일’이라고나 할까. 퍼주기와 북의 선의(善意)에만 의존하는 단선적 포용 정책은 이미 한계에 왔다. 우파 보수정권하에서 국민의 컨센서스에 기초한 지속 가능한 대북 정책을 펴려면 정책도 진화(進化)해야 한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