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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제균]정치가 뭐기에

입력 | 2008-03-04 19:55:00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성공한 50대 후반. 돈이라면 자식 대까지 걱정 안 할 정도로 모았다. 아이들도 ‘사’자로 잘 키웠다. 건강은 40대 초반이고, 아내는 여전히 아름답다.

“다 되는데 왜 이것만은 안 될까….” 고개를 숙인 채 넋 나간 듯 독백을 하는 그의 곁에 한 정당의 공천자 명단이 실린 신문 기사가 찢겨 있다.

대선에 이은 총선, 연이은 정치의 계절이다. 정당 공천 때가 되면 언론사 정당 담당 기자들의 휴대전화가 바빠진다. 공천 기사 쓸 때 조사 하나라도 잘 써 달라는 뜻일 게다. 하지만 게이트 키핑(내부검열) 과정에서 조사라도 잘 써 주기가 쉽지 않은 게 정상적인 언론이다. 전화의 십중팔구는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없던 정치인들이다.

한 정당의 공천심사위원회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역구나 국가 발전 구상에 대해 좔좔 얘기하는 공천 신청자도 ‘왜 정치를 하려고 합니까?’라고 물으면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곤 조금 있다가 ‘예상 답변’이 나온다.”

예상 답변을 요약하면 작게는 ‘내 고장 발전을 위해서’고, 크게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서’ 등이다. 하지만 이 답변이 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은 공심위원도 알고, 신청자도 안다. 도대체 정치, 왜 하려는 걸까?

정치에 발을 담갔던 한 변호사의 얘기. “변호사만 하던 때 나는 돈 많은 소시민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정치를 하고 나니 비로소 ‘사회참여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더라. 지금은 정치를 안 하지만, 한 번 이름이 나니 변호사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지난해 본보가 연재한 폴리페서(정치교수) 시리즈 취재 중 접촉했던 한 교수. “내가 실력을 무시했던 교수가 정치권에 몸담은 뒤 총장과 맞상대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여기에 교수의 자동복직을 보장하는 ‘법적 지원’까지 겹쳐 교수는 정치로 향하는 가장 수월한 직업으로 부상했다. 새 정부에서도 장관 내정자 15명(중도사퇴 포함)과 대통령실장, 수석비서관 등 24명 중 교수 출신이 절반(12명)이나 된다.

변호사도 교수도 아니고, 돈도 없이 여의도를 떠도는 수많은 이에겐 정치가 일종의 로또다. 금배지만 달면 그동안의 설움과 콤플렉스를 일거에 날려버릴.

‘1인 헌법기관’이었다가 끈 떨어진 많은 이에게 정치는 아편과도 같다. 4년 전 낙선한 뒤 절치부심하다 이번에 공천을 신청한 전직 의원의 경험. “의원일 때는 휴대전화 두 개에서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리다 낙선한 다음 날부터 휴대전화가 뚝 끊긴다. 제일 먼저 기자들의 전화가 끊어지는데, 그게 가장 서럽다.” 여의도에는 ‘금배지를 달아본 뒤 두 번 연거푸 낙선하면 갑자기 늙거나 병이 생긴다’는 속설까지 있다.

교수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부총리에 이어 국무총리까지, ‘하나’만 빼고 다 해본 한승수 국무총리에게 총리가 되기 전 “뭐가 가장 좋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도 주저 없이 “국회의원”이라고 답했다.

소아(小我)를 떠나 공적인 기여를 하려는 순수한 열정까지 폄훼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왜 정치를 하려느냐’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부나방처럼 달려들다 어느 날 ‘휴대전화 뚝 끊기는’ 이들이 양산되는 작금의 상황은 국가적 소모전이다. 도대체 정치가 뭐기에….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