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16일까지 매화문화축제 열려
‘문향’(聞香). 국어사전에는 ‘향기를 맡다’고만 풀이돼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향기에 이 단어를 쓰지는 않습니다. 오로지 매화만을 위한 단어입니다.
연전 삼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 오랜만에 뚫린 눈길로 강원도 산골짝에서 법정 스님께서 상경하셨습니다. 차나 한 잔 하자던 스님의 전갈을 받고 찾은 곳은 서울 북한산 자락의 길상사였습니다. 봄볕 따사로이 내리쬐던 방에서 스님은 하얀 찻잔에 따뜻한 물을 붓고 그 위에 꽃 한 송이를 띄워 주셨습니다. 매화차였습니다.
잔 속에 담긴 하얀 꽃. 그러나 향을 맡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스님께서 하신 말씀, ‘매화 향은 코로 맡지 않고 귀로 듣는다’는. 문향(聞香)이란 ‘관세음’(觀世音·세인의 기도소리를 눈으로 본다)처럼 표현이 선적입니다. 향을 귀로 듣는다는 그 절묘한 표현. 거기에는 분명 큰 뜻이 담겼을 겁니다. 허다한 꽃과 달리 한겨울 모진 풍상 속에서 어렵사리 꽃을 피워내는 굳센 의지와 강인한 성정에 걸맞은 예우겠지요.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습니다. 울 할머니 손등처럼 마르고 투박한 매실나무 가지에서는 올봄도 매화가 꽃망울을 꽝꽝 터뜨리고 있습니다.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외투 깃을 올려야 할 만큼 겨울 한기가 성성한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는 남쪽으로 내달려 전남 광양시 백운산 자락의 매화마을(다압면)을 찾았습니다. 양지녘부터 막 피기 시작한 매화는 올해 열두 해를 맞는 광양 매화문화축제(8∼16일)가 시작되는 8일쯤이면 보기 좋게 마른 가지를 흰 꽃으로 뒤덮을 것입니다.
섬진강변 다압면 일대는 지금 매화천국
다압의 매화는 특별합니다. 섬진강 곱디고운 백사장, 그 위로 귀밑머리 나풀대는 열일곱 소녀의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칼처럼 그 흐름도 수려한 초록빛 섬진강 때문입니다. 그 물과 모래를 배경 삼아 푸른빛이 감돌 만큼 희고도 흰 청매화의 앙증맞은 꽃을 본다는 것은 특별한 선물이 아닐지요. 하나 더 보탠다면 그 꽃을 자식 삼아 적삼 깊이 품에 품고 43년 동안 돌산을 오르내리며 손이 호미가 되고 괭이가 되도록 매실나무를 심고 가꾸며 그 결실을 몸에 이로운 것으로 만들어낸 이곳 청매실농원의 ‘아름다운 농사꾼’ 홍쌍리(65) 명인입니다. 돌산기슭의 척박한 땅 다압면을 매화천국의 부자마을로 일으켜 세우는 데 주춧돌 역할을 하신 그분입니다.
그분에게도 향기가 납니다. 매화와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리며 맡아서는 안 될 귀하고 고아한 암향(暗香) 말입니다. 그런 만큼 귀로 들어야 제격이겠지요. 그러니 이 봄 다압으로 매화를 보러 떠나는 여행길은 꽃과 사람, 아니 가수 김장훈의 노래대로라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를 들으러가는 멋진 노정일 겁니다. 오늘은 섬진강변 광양의 다압 매화마을로 가는 특별한 여행을 마련했습니다.》
매화 香은 귀로 듣고… 명인의 香은 가슴으로 듣고
○홍쌍리 명인, 1960년대 후반부터 돌산에 꽃마을 일궈
홍 명인의 원래 이름은 ‘상의(相義)’였다. 그런데 호적에 올리기 위해 면사무소를 찾은 아버지에게 면서기가 ‘쌍둥이처럼 두 몫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더 좋지 않겠느냐’면서 ‘쌍리(雙理)’를 권해 그렇게 바뀌었다. 이름이 운명을 지배한다면 홍 명인의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1965년 산골벽지 이곳에 시집와 지옥 같은 돌산을 다이너마이트로 부수고 똥 짐 져가며 매실나무 천국으로 바꾸는 노역을 마다하기는커녕 제 스스로 원해 그리 해왔기에 그렇다.
“시집온 지 한 1년쯤 됐겠지예. 허리가 휘도록 고된 산골살림에 정신이 없는데 살포시 핀 매화꽃이 이래 말하는기라예. ‘엄마 엄마 니(너) 고마(그만) 울고 여(기)서 내캉(나하고) 살자’꼬 말입니더.” 지금도 매화꽃을 ‘내 딸’이라고 부르며 자식처럼 돌보는 홍명인과 매실나무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이곳에는 시아버지(작고)가 일본 광산에서 일해 번 돈으로 사온 밤나무와 매실나무(각 5000그루)가 있었다. 그러나 돈벌이 좋은 밤나무에 비해 매실은 경제성이 떨어져 괄시받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매화동산을 만들겠다는 홍 명인의 꿈은 이루기가 더욱 힘들었다. 매화동산의 꿈을 갖게 된 것은 벚꽃이 화창하게 핀 진해로 사람들이 꽃놀이 하러 몰려가는 모습을 보고나서다. 그러자면 밤나무를 잘라내야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밤 시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졸라댔고 그 수확으로 몇 그루 베어낼라치면 나무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시어머니는 물론 동네 사람까지 몰려와 타지에서 시집온 고집 센 며느리가 시부모 거역하고 집안 박살낸다고 타박했다.
결혼 4년 후. 광산 개발에 손을 댄 남편이 사업 실패로 몸져눕고 45만 평의 산과 토지도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갔다. 빚쟁이는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빚 독촉을 해댔고 본인 스스로도 난치성 류머티스로 팔다리를 움직이기 어려웠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런데도 매화동산의 꿈은 꺾이지 않았다. 다섯 아이의 맏이인 어린 장남까지 일손으로 부리며 똥지게로 매실나무에 거름을 주며 지성으로 나무를 가꿨다.
그 언제부턴가 홍 명인에게는 버릇이 생겼다. 구시렁구시렁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인데 본인 말로는 꽃과 나누는 대화다. “그런 내를 보고 사람들이 웃긴다고 안 합니꺼.” 거기에 담긴 홍 명인의 매실사랑은 산에서 물가에서 수시로 남긴 시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슬플 때나 괴로울 때 같이 울어주던 내 딸들아, 꽃샘추위와 봄비에 꽃잎마다 방울방울 맺힌 너의 눈물이 이 애미의 가슴을 한없이 적시는 구나…애미의 손이 시리고 굳어서 보듬어주지 못할 만큼 추운 이 봄날의 꽃샘 추위가 오면 이 애미는 새벽같이 버선발로 뛰어나가 네 꽃잎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나의 눈물이 내 가슴을 한없이 적시곤 했지’(‘사랑하는 나의 꽃잎들’ 중에서).
○“이번 주말이면 매화 화사하게 필 낍니더”
지난 주말 찾은 섬진강. 따뜻한 봄볕에 고운 모래해변은 눈이 부실만큼 환히 빛났다. 더불어 마른 가지에도 봄기운이 내려앉아 꽃눈은 지금이라도 당장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로 땡땡하게 불어있었다. 그러나 땅 만큼은 아직도 겨울 기운이 느껴지는 3월의 둘째 날. 팝콘처럼 풍성하게 메마른 가지를 뒤덮는 매화동산의 그림을 그리기에는 섣부른 날이었다.
“다음 주(8, 9일경)면 꽃이 화사하게 필 낍니더.” 해지고 빛바랜 패랭이를 쓰고 축제 준비에 분주하던 홍 명인은 이렇게 말한 뒤 ‘잠시 내 좀 봅시다’며 기자의 손을 끌었다. 이끌려 간 곳에서 본 것은 노란 한지에 홍매화 두 송이 그리고 그 위에 화제(畵題)처럼 붓으로 쓴 시 한 수를 올린 그림 한 점.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이 시를 읽는 순간 봄날 매화꽃 핀 다압 매화마을의 이 풍경, 아니 손이 호미 되도록 돌밭을 매화동산으로 가꾼 홍 명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를 볼 수 있는 곳. 사람의 향기도 매화처럼 귀로 들어야 하는 곳. 화창한 봄날, 청매실 흰 꽃이 하얀 구름처럼 섬진강변 산등성을 덮는 광양 매화마을 그곳이니 올봄에는 이곳으로 매화꽃과 사람 향기를 들으러 떠나보자.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정보
◇찾아가기
대전통영고속도로∼장수나들목∼국도19호선∼번암∼남원∼산동∼구례∼지방도861호선∼다압면∼광양매화마을(섬진마을)
◇갈 곳
▽광양 매화마을=백운산 기슭 다압면의 섬진강변 마을(옛 섬진마을)로 청매실농원을 비롯한 여러 매실농가가 산기슭과 둔덕에 매실나무를 키우며 살아가는 곳. 홍 명인의 시아버지(김오천)가 국내 최초로 시작한 매실나무 집단재배(1931년)가 시초. maehwa.invil.org 다압면사무소(고사리) 061-797-3001 ▽청매실농원=25ha의 돌산기슭을 개간, 매실나무 5만 그루를 유기농법으로 키워 매실을 비롯한 가공식품을 생산하고 매실농가 지원을 위한 연구소까지 갖춘 국내 매실산업의 선두 기업. 파릇파릇한 보리 싹으로 덮인 과수원은 전체가 공원처럼 개발돼 산책하기에 좋다. 산책로 정상에 서면 농원과 섬진강, 하동쪽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매실장아찌와 된장 등을 익히는 2200여 개의 장독도 인상적이다. 홍 명인에게 매실건강법 강의도 들을 수 있다. 입장료 없음. 매화꽃은 3월 말까지 지속된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414 www.maesil.co.kr 061-772-4066
◇여행 상품
버스로 다녀오는 하루 일정. 서울∼금전산 금둔사(순천)∼청매실농원. 8, 9, 11, 15, 16, 22, 23일 출발, 4만1000원. 승우여행사(www.swtour.co.kr) 02-720-8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