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하도 외면당해, 시인과 독자를 도우려고 한국 문화예술추진위원회의 문학나눔팀이 지난 몇 년간 우수시집을 선정해 보급했는데 혹 그 효과로 시집이 팔리는가? 교보문고의 최근 몇 년간 통계는 40대 중반 이후 남성이 이전 연령층과 여성보다 시집을 더 구매했고 50, 60대 남성이 같은 연령대의 여성보다 시집을 많이 사는 추세라고 분석하면서 중년 이후 우리 남성가장의 어려움과 시의 치료적 효능으로 해석했다.
중년 남성 ‘상처의 꽃’ 시집 찾아
그렇기도 하리라. 사실 시란 상처에서 피는 ‘상처의 꽃’ 아닌가. 본래 문학은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패자의 기록이고 햇빛 아닌 달빛에나 익는, 사실 아닌 진실이니, 불행이나 불운, 좌절과 실패에 대한 피맺힌 항변이고, 회한 고백 변명이니까. 삶을 체험할 만치 체험하고서야 자기 모습을 제대로 검토 성찰하고 위로하는 진실이니까. 무가치하다면 시처럼 무가치하고 무력한 것이 없고 가치가 있대도 칼국수 한 그릇, 소주 한 병 값이 고작인 시집 한 권인데, 그 한 권에 바친 시인의 피눈물은 오죽했겠나 말이다. 가치 없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는 요설이 시만큼 잘 적용되는 무엇이 또 있는가? 그래서 무가치한 시가 무가치한 존재임을 통감하는 독자의 허무 좌절 패배에 약손이 되는 게 아닐까. 패배를 경험한 사람만이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진실의 항변과 변명에 감동받을 테니까.
불안한 직장, 이해받지 못하는 가정, 현기증 나는 속도시대의 무한경쟁 사회는, 개인을 얼마나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내몰고 있는가. 살아봐도 별 수 없는 현실과 미래는 얼마나 비정하고 공포스러운가. 삶이란 것을 몸서리치게 체험한 가장들의 상처에서 더욱 제대로 내비치는 자기성찰이 시와 흡사하지 않은가? 간결한 몇 줄의 진실에서 깊고도 긴 울림은, 숨겨온 상처를 스스로 치료할 수밖에 없는 절대고독 그대로가 아닌가. 남모르는 곳에 홀로 숨어, 남모르는 상처를 제 혓바닥으로 핥아 몰래 치료하는 시인의 체험적 처방이자 기도문이자 넋두리에서 ‘이게 바로 나야’ 하는 공감 이상의 감동과 위로를 얻을 수 있겠지.
부친의 김밥 가게를 물려받는다는 구실로 사직한 검사, 잘되는 병원 문 닫고 순두부집을 개업했다고 이혼 당한 의사…. 많은 남성이 중년에 이르러 자신을 바꾸고, 부인을 바꾸고, 직장과 직종까지 바꾸느라, 새 전공을 공부하러 50줄에 대학에 재입학하는 등 정체성 재확립을 시도한다. 아예 직업을 포기하고 떠도는 50대의 한 가장은 부인과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조차도 용돈만 기대하신다고, 자신은 인간도 가족도 아닌 돈 버는 기계나 돈 되는 알만 낳아야 하는 닭이나 소 돼지에 불과하다고 자조한다.
詩로 위로받고 다시 힘내라
이렇게 누구의 중년이든 중년에는 억울해진다. 살아 보니 이게 아닌데…. 뼈저리게 회한과 재검토와 성찰하는 중년. 카를 융도 중년에 이르러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자기를 찾아 방황하다 미쳐버렸고 가족의 심리적 지지로 마침내 중년기 정신분석이론을 구축했다. 중년 이후부터 가족의 지지가 더욱 필요한데, 타인 같은 가족과 무한경쟁 사회는 이 위기를 더욱 부채질해 혹시 시에서 상담 치료와 종교적 기능까지 기대하는 건 아닐까? 외환위기 때, 평소 네댓 명이 고작인 시·소설 창작교실에 중년남성 100여 명이 몰렸던 일도 비슷한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했으니까.
“문학도 아닌 청소년이 없고 철학도 아닌 노년이 없다”는 말은 이젠 옛말이 됐으니 값없는 시가 제 값하는 시대가 올 조짐인가? 감성과는 거리가 있다던 중년 이후 남성들이 시에서 위로와 성찰을 얻는다니 시(예술)가 세상을 바꿀 거라고 좋아해도 되나 모르겠다.
유안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