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낙태 시술 전문의였던 데이비드 건 박사는 자가용에 늘 권총 3정을 갖고 다녔다. 낙태반대론자들의 잇따른 방화와 살해 협박 때문. 그는 집을 팔고 호텔을 떠돌았으며 출퇴근을 할 때도 만일을 위해 지름길 대신 시 외곽을 빙빙 돌아야 했다.
건 박사의 불편한 일상은 1993년 3월 10일 비로소 끝이 났다. 그러나 비극적 결말이었다. 그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병원으로 걸어가던 중 급진적 반(反)낙태운동 단체인 ‘미국을 구하라’의 조직원인 마이클 그리핀이 쏜 총에 등을 맞고 숨졌다. 건 박사가 일했던 플로리다 펜서콜라 산부인과의 건너편에서는 그날도 ‘미국을 구하라’의 낙태 반대 시위가 한창이었다.
그 단체의 대표였던 존 버트는 “건 박사의 죽음은 유감이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새 생명을 살릴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라며 “히틀러의 주치의를 죽인 사람을 비난할 수 없듯 마이클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주장했다.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낙태권리를 인정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났건만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건 박사가 피살당한 때는 낙태 논쟁이 극단으로 치닫던 해였다. 의사들은 반대론자들의 보복이 두려워 대부분 시술을 피했다.
불임부부를 위한 인공수정 전문가이기도 했던 건 박사는 낙태 시술을 받으려고 하는 여성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이가 필요한 부부에게는 아이를, 아이가 두려운 미혼모에겐 자유를 주는 게 의사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건 박사의 피살은 비극의 절정이 아닌 시작이었다. 이듬해 7월 장로교 목사인 폴 힐이 의사 존 브리튼과 그의 경호원을 총으로 사살했다. 힐 목사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산부인과 의사에 대한 테러는 그 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낙태는 오늘날에도 미국 대선 구도를 뒤흔들고 있다. 낙태 찬반 여부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가르는 잣대이자, 공화당 내에서도 중도와 정통을 가르는 이슈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공화당 경선 전까지 선두를 달리다 지난해 낙태 옹호 발언 때문에 낙마하기도 했다.
우리도 최근 정부가 모자보건법의 개정을 추진하면서 낙태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낙태 허용 사유에 미혼 임신이나 경제적 불안정 등 사회적 요인까지 추가하는 방안에 종교계가 반발하고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의 존엄성은 한쪽이 다른 쪽을 굴복시킬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는 것. 피로 얼룩진 미국의 낙태 논쟁사가 주는 교훈이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