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씨는 2003년 봄 KBS 사장이 됐고 2006년 가을 연임했다. 5년 전,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이회창 정부가 등장했더라도 그게 가능했으리라고는 정 씨 자신부터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정 씨의 인격적 문제는 새삼 들출 생각이 없다. 그는 지난 5년간 KBS 방만 경영 및 조직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의 중앙에 있었다. 그러고도 연임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노무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필칭 ‘국민의 방송’이라는 KBS를 좌파권력의 나팔수로 전락시켰다. ‘정연주 KBS’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否定)하거나 반미(反美)를 부추기는 프로그램, 노 정부를 일방적으로 감싸면서 비판신문을 흠집 내는 프로그램 등을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수많은 신문의 경우 저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수 있어 사시(社是)부터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어떤 신문이건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과 헌법정신을 짓밟는 일탈(逸脫)까지 허용되지는 않는다.
하물며 국민 소유의 전파(電波)를 위임받아 운영하는 공영(公營)방송이 보편적 국리민복(國利民福)과는 거리가 먼, 좌파 또는 사회주의 이념의 선전(宣傳) 도구 노릇을 한다면 이는 반(反)국민 행위다. 정 씨 휘하의 KBS는 남미 베네수엘라의 반(反)민주·반(反)시장·사회주의 독재자 우고 차베스를 ‘본받아야할 지도자 모델’로 미화(美化)한 다큐멘터리로 국민을 오도(誤導)하려고도 했다.
이명박 정부서 버티는 정연주
백번 양보해, 그런 정 씨가 노 정부 기간에는 KBS 사장으로 버틸 일말의 근거가 있었다고 치자. 2002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의 선택 속에는 좌파코드에 대한 일정한 지지가 포함됐다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 씨는 지난해 대선 결과를 보고 즉시 KBS 사장직에서 자퇴(自退)했어야 상식에 맞다. 국민은 노무현 좌파정권을 응징하며 큰 표차(票差)로 이명박 우파정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표심(票心)은 노무현코드의 한 부품(部品)이었던 정 사장에게도 기능 종료를 명령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정 씨는 내년 11월 연임 임기까지 버틸 태세다. ‘탄핵방송’ 등에서 노 정권 비호 ‘편파방송’의 선봉장이던 사람이 정권교체가 확인된 순간 “모든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친 것은 한편의 코미디다.
노 전 대통령은 고향 봉하마을에서 발가락양말에 슬리퍼를 신고 유유자적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정 씨를 비롯해 노 정권 아래서 기득권층이 된 사람 중에는 ‘내 밥그릇 못 내놓겠다’며 농성(籠城·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킴)을 계속하는 부류가 적지 않다. 특히 언론주변 운동권단체에서 공직이나 관변(官邊)으로 진입했던 사람들, 그리고 문화계 이익집단의 중심에 포진한 좌파세력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그동안 ‘권력의 떡고물’ 주무르던 맛에 취한 탓인지, 자신들이 ‘응징 받은 정권의 일부’라는 사실에는 눈감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파에서 좌파(김영삼→김대중)로, 다시 좌파에서 우파(노무현→이명박)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함으로써 정권교체의 ‘제도적 확립기’를 맞았다. 이로써 공공기관이나 특수권력기관의 ‘형식적 중립’보다는 책임정치가 더 중요해졌다. 임기제가 정권교체를 명령한 민의(民意)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돼선 안 된다. 특히 우리와 같은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는 국정의 모든 책임을 대통령과 집권당이 지게 돼있다.
미국에서는 정권이 바뀌는 순간, 물러나는 정권의 임명직 사람들은 극히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삿짐부터 싼다. 하지만 요즘 청와대 일각에서는 “껍데기만 정권교체지, 속은 아직도 노 정권이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코드정권 바뀌면 떠날 줄 알아야
정권교체의 본질은 인적 교체다. 누가 정권을 잡든 가장 중요한 첫 6개월을 인적 교체 문제로 시름하다가 탈진한다면 국정 성공을 기약하기 어렵다. 전임(前任) 대통령이 임기 말에 기관장과 산하단체장 자리에 코드 인물들을 앉혀놓고 후임(後任) 대통령 골탕 먹이는 행태가 5년 뒤에는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제도적 보완을 해야 한다.
그 이전에 ‘정연주 식 버티기’가 국민 사이에서 통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식객(食客)들은 한 정권이 끝나면 곧장 자리를 털고 사라질 줄 알아야 식객 자격이나마 있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