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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30선]제49호 품목의 경매

입력 | 2008-03-11 02:54:00


《“신은 미합중국 우편제도를 이용하지 않기로 한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을 것이므로 그들의 선택은 결코 반역 행위가 아니었으며, 또한 반항의 표시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국가가 지배하는 삶에서, 즉 국가의 기계 장치와도 같은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거의 매해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로 오르고 있는 토머스 핀천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원조로 알려진 작가다. 그의 소설은 복잡한 상징이 많아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소설 ‘중력의 무지개’는 1974년 퓰리처상 후보로 추천됐으나 퓰리처상 위원회가 ‘읽기 어렵다(Unreadable)’는 이유로 거부해 결국 그해 퓰리처상 수상작을 내지 못했다.

1966년 발간된 핀천의 두 번째 소설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난해한 그의 작품 중에서 상대적으로 쉽다는 평을 받았다.

이 소설은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주부 에디파가 옛 애인인 부동산 재벌 피어스의 사망 소식과 함께 그의 유산 집행인으로 위촉됐다는 편지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피어스의 유산 집행을 위해 캘리포니아 남쪽의 샌나르시소로 간 에디파는 우연히 위조 우표를 만들어 교류하는 트리스테로라는 지하 우편 제도를 추적하게 된다. 에디파는 트리스테로가 ‘W.A.S.T.E.’라는 명칭으로 소외 계층이 이용하는 지하 우편 제도로 남아있으며 ‘W.A.S.T.E.’는 ‘We Awaite Silent Triestero's Empire’(‘우리는 조용한 트리스테로 제국을 기다린다’는 뜻)의 약자임을 알게 된다.

코넬대에 입학해 물리학에서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핀천은 물리학 이론인 엔트로피 이론을 이 소설에 차용해 정보 소통에 대한 은유로 사용한다. 즉 외부에 대해 교류하고 열려 있지 않은 닫힌 체계는 파멸할 수밖에 없는 만큼 열린 체계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미국의 우편 제도는 인간 교류의 통제를 의미한다.

트리스테로를 추적해 가던 에디파는 자신이 믿고 있던 진실과 현실에 대해 점차 회의하며 이 세계 넘어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소설 끝에서 에디파는 위조 우표가 제49호 품목으로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지하조직 트리스테로가 실재한다면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우표를 입찰하러 올 것이라고 생각한 에디파는 경매장을 찾는다.

소설은 에디파의 기다림으로 끝을 맺는다. 결론을 유보하는 이런 ‘열린 결말’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한 특징인 ‘열림’ 모티브와 연결된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패러디와 수많은 상징을 만나게 된다. 심지어 편집자주(註)의 도움이 없다면 상징임을 눈치 챌 수 없는 것도 적지 않다. 핀천은 이 소설에서 허구와 현실을 뒤섞고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기술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핀천은 공식적 역사를 비롯해 모든 ‘원전’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핀천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책 마지막에 있는 역자의 작품 해설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역자는 핀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성곤 서울대 영문과 교수. 작품 전체와 세세한 상징에 대한 그의 명쾌한 해설은 미로 같은 이 작품의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