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매카시의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보안관 벨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자신이 검거해 처형실로 보낸 한 소년에 얽힌 이야기다. 소년은 열네 살 소녀를 죽였다. 언론에서는 치정이라고 떠들었지만 소년은 벨에게 치정 따위는 없었고 아무나 죽일 계획이었다고 했다. 혹시 감옥에서 나가면 또 그런 짓을 할 것이고 지옥에 갈 줄도 알고 있다며. 벨은 생각한다. ‘그런 녀석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혹시 새로운 종자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원작에서)
그러나 영화엔 이 후 ‘더한 놈’이 나온다.
스크린이 ‘절대악’으로 물들었다. ‘노인…’의 무표정한 살인 기계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이기주의와 염세주의의 화신인 석유업자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루이스), ‘추격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들을) 판 게 아니라, 죽였어요” 하는 연쇄살인마 지영민(하정우)까지.
예전 영화에서는 살인마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살인마의 대명사 한니발 렉터(‘양들의 침묵’ ‘한니발’)조차 동정의 여지는 있었다. 그는 주인공을 도와주기도 하는 양면성을 가졌다. 그가 괴물이 된 데는 ‘한니발 라이징’에서 밝혀진 것처럼 어린 시절 여동생과 관련된 강력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 영화의 악역에겐 일말의 인간적인 감정이 없다. 그들은 ‘왜?’라는 의문을 거부한다.
데이루이스와 바르뎀은 최근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각각 남우주연상과 조연상을 받았다. 미국 연예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시상식 전부터 그들의 수상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올해 아카데미를 영화적 악의 신기원이 열린 ‘나쁜 남자들의 해’로 규정했다. 물론 시거에겐 돈, 플레인뷰에겐 석유라는 목표가 있지만 왜 그렇게까지 잔인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두 영화의 감독들마저 자기 영화를 일종의 공포영화라고 했다. ‘추격자’의 지영민도 그렇다. 영화에선 심리학자가 그의 성불구가 범행의 원인인 것처럼 몰아가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나홍진 감독은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동기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을까. 그들은 자기 마음속 깊은 곳의 그 동기를 의식하고 있을까.
흉악 범죄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이유를 궁금해 한다. 그런데 이유는 너무 뻔하다. 불우한 성장 과정을 거쳤고 평소 조용하며 사회적 유대 관계가 없는 사람들…. 어떤 이는 ‘남 탓’ ‘사회 탓’을 하고, 누구는 윤리 교육의 부재를 떠들어댄다.
인간은 모든 현상에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래야 설명이 가능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통제가 가능하니까. 그러나 인간의 행동에는 별 이유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게 더 무섭다.
도대체 어디서 온 인간들일까. 그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네가 무슨 상관이지. 친구?”(‘노인…’에서 시거의 대사)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