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들은 이미 최종 이론의 많은 부분을 이룩했다. 우리는 행성의 궤도를 알고 있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어림잡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종교적 통찰도 없다.…과학은 한때 서구 문명 전체를 주재하던 인격신으로부터 우리를 너무 멀리 떼어놓았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의 창시자로 불리는 미국 하버드대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저서 ‘통섭(統攝)’은 2005년 국내에 번역된 뒤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학마다 전공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지식의 통합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전공 학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폭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미래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학계의 이런 변화는 기업과 정치권으로 확산됐다.
통섭은 낯설진 않게 됐으나 제대로 이해했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단어다. 윌슨 교수의 제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옮긴이 서문에서 “통섭이라는 단어를 이해했다면 책의 절반을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썼다.
1998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의 원제 ‘consilience’는 1840년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휴얼은 ‘jumping together’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온 이 단어를 통해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얻어진 귀납들이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설명했다.
역자는 이 제목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를 놓고 5년 이상 고민했다. 통섭은 불교에서 쓰는 말로 ‘큰 줄기를 잡다’ ‘총괄하여 다스린다’로 해석된다.
이 책은 생물학 사회과학 심리학 예술 종교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관점을 추구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갈래갈래 쪼개진 특정 학문의 공부로는 그런 관점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16세기 이후 학문의 세분화가 지식의 양적 성장에는 기여했지만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통합적인 이해를 통한 지적 쾌감은 오래 잊혀지지 않는다. 저자는 그런 이해가 지성의 궁극적 목표라고 말한다. 그 미지의 수평선 너머에서 그가 예견하는 것은 혼돈이 아닌 질서다.
우리 사회에도 이미 통섭이 진행되고 있다. 1990년대 유행한 ‘퓨전(fusion)’도 통섭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나와 믿음이 다르다고 해서” 덮어버릴 수 있는 변화가 아니다.
윌슨 교수는 “통섭의 개념은 아직 빈약하며 간헐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는 방법들의 연계가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통섭 불가능의 증거로 속단하지 말라고 경계한다.
본격적으로 줄기를 뻗어 나가기 시작한 인간 지성의 통섭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헤르만 헤세는 1943년 ‘유리알 유희’에서 모든 학문과 예술, 사유와 감정을 통합한 이상향을 그린 바 있다. 그는 인류 문화의 모든 가치를 아우른 ‘유희’를 오르간 연주와 비슷한 예술 행위처럼 묘사했다. 윌슨 교수는 저서의 말미에 “진보라는 이름 아래 도덕과 예술을 내동댕이치지 말라”고 역설한다.
알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고자 하는 욕망이다. 알면 사랑하고, 그 사랑은 아름답다. 거기에 경계가 있을 리 없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