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모키드(Emo-Kid). 최대한 순종하지 않으려 하지. 나는 내 손톱을 칠하고 화장도 했지… 나는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내 삶을 증오하지. 내 삶은 그저 검은 지옥. 너무 어두워… 나는 이를 표현의 자유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왕따’라고 하지….” 미국 동영상 전문 사이트 ‘유튜브’에서 꼽은 ‘베스트셀러’ 동영상 중 하나는 ‘더 이모 송(The Emo song)’이다. 미국의 2인조 남성 듀오 ‘애덤 앤드 앤듀’가 만든 이 노래는 현재까지 조회 수가 200만 건 이상이다. 이를 패러디한 동영상만 수십 개다. 1년 전 이를 처음 접했다는 대학생 최재훈(23) 씨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검은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스키니진을 입으며 한쪽 머리를 턱까지 내리는 외적인 변신은 기본이다. 한없이 우울하고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해 자기만의 세계를 중시하는 그의 삶이 ‘이모 라이프(Emo-Life)’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상처럼 여겼던 캐나다 출신 여성 로커 에이브릴 라빈도 대표적인 ‘이모’ 뮤지션인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21세기 신인류, ‘이모 제너레이션(Emo-Generation)’이다”라고….》
#Emo-Self(정체)… 우울한 감성을 먹고사는 세대
지난해 말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서는 ‘뉴제너레이션-이모(New Generation-Emo)’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주제는 “다양한 감성을 가진 10대들이 이성이 중시됐던 사회에 새로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모셔널(Emotional)’의 앞 글자를 따 만든 ‘이모’는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으로 국내 10대와 20대에게도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모키즈, 이모보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감성’으로 패션, 음악, 행동, 가치관 등 모든 분야를 감성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비논리, 비합리’가 이들의 행동 강령이며 ‘우울함 즐기는 법’ ‘신경질 멋있게 부리는 법’, 심지어 ‘왕따’ ‘자해’ 등에 대한 정보를 주로 미국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인 ‘마이스페이스’를 통해 서로 나누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포털사이트 커뮤니티에는 이모 스타일 및 이모 밴드 등 이모 관련 인터넷 동호회만 수십 개다. 회원이 2000명을 넘는 동호회도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어 주로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 인맥을 맺길 원한다. 반대로 오프라인 대인 관계는 온라인에 비해 감정 표출이 원활하지 않아 지극히 소극적이다.
스스로 ‘이모 제너레이션’이라는 대학생 이주현(19) 씨는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행복한 척하지 않고 우울한 감성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모 키즈의 저항은 ‘기분 표출’의 유무에 있다. 이는 과거처럼 공공의 적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이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성주의자들은 스스로 ‘사회적 약자’임을 알고 있다”며 “그러한 패배주의를 깨닫는 순간부터 우울함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Emo-Music(음악)… X세대 ‘루저’ 이야기
1960년대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로 대표됐던 히피 문화부터 1970년대 그룹 ‘섹스 피스털스’의 펑크, 1980년대 ‘듀란듀란’의 뉴웨이브, 1990년대 투 팩, 노토리어스 비아이지로 대표되는 힙합 문화까지. 젊은 세대의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이모 제너레이션을 대표하는 음악인 ‘이모’ 장르는 1980년대 미국 뉴욕, 보스턴 등에서 행해지던 과격한 펑크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바뀐 것은 무조건 과격하고 때려 부숴야 하는 음악에서 벗어나 10대 감성에 맞게 멜로디를 강조했다. 소녀적인 록으로 변신한 것이다. 음악평론가 김작가 씨는 “일명 ‘파티 록’으로 불리는 이모 뮤직에는 허무주의, 패배감 등 ‘X세대 루저(Loser)’가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이모 키즈를 대변하는 대표 뮤지션 중 한 명은 여성 로커 에이브릴 라빈이다. 2002년 데뷔 후 ‘컴플리케이티드’ ‘스케이터 보이’ 등을 연달아 히트 시킨 그는 10대의 소소한 사랑, 감정의 변화 등을 신경질적인 기타 연주에 담아 인기를 끌었다. 올해 초 내한 공연을 한 5인조 밴드 ‘마이 케미컬 로맨스’를 비롯해 ‘아이 라이트 신스, 낫 트레저디스’를 히트시킨 4인조 밴드 ‘패닉! 앳 더 디스코’ 등이 대표적인 이모 밴드로 꼽힌다.
월간 ‘핫뮤직’의 조성진 편집장은 “거대 담론을 담았던 과거 록 음악은 이데올로기에 무딘 이모 키즈에게 공감을 얻지 못한다”며 “지금의 이모 키즈에게는 록의 정통성보다 ‘나’의 감정을 얼마나 예쁘게 포장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 영상취재·편집 :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Emo-Style(패션)… 슬픔은 내 패션의 콘셉트
국내에서 이모 문화가 가장 많이 퍼진 분야는 패션이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슬픈 존재”라는 정신을 담은 이모 스타일은 생각보다 정형화됐다. 한쪽 눈을 뒤덮은 이른바 ‘애꾸눈’ 헤어스타일부터 뿔테 안경, 자신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적힌 반팔 티셔츠, 실버 체인, 실버 벨트, 팔찌 등 현란한 액세서리, 딱 달라붙은 스키니진, 그리고 아예 이모 키즈의 대표 격이 돼 버린 흰색 ‘컨버스’ 운동화까지.
이 중 스키니진과 컨버스 운동화는 현재 10대를 관통하는 이른바 ‘이모 패션의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올해 ‘와이드 팬츠’를 비롯한 부피감을 강조한 패션 아이템들이 다시 인기를 끌 것이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쇼핑몰 ‘G마켓’의 통계에 따르면, 스키니진 판매량은 지난해 12월 22만 건에서 올해 1월 25만 건, 지난 달 28만 건 등 계속 늘고 있다. 이 밖에 컨버스 운동화는 월평균 5만 건, 스모키 화장용품도 4만 건이 팔린다.
여기에 완벽한 이모 키즈가 되기 위해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스모키 화장’과 검은색 매니큐어다. 이른바 ‘상처받은 영혼’ ‘멍든 자아’를 나타내기 위해 눈을 검게 그을리고 손톱을 검게 칠하는 것이다. 1990년대 힙합 패션이 뚱뚱한 체형까지 커버했다면 이모 스타일은 ‘말라깽이’들만의 특권 패션으로 여겨진다. 최대한 마르게 보여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것이 이 패션의 목적이다. 패션 칼럼리스트 겸 패션 홍보대행사 ‘오피스 에이치’의 황의건 대표는 “과거 젊은 세대가 청바지를 찢어 입으며 거칠게 반항심을 표출했다면 지금의 이모 키즈는 우울한 감성을 마른 몸매로,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스모키 화장으로, 좀 더 여리고 패셔너블하게 연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mo-World(행동양식)… 제3의 존재?
뭐가 그렇게 우울하고 슬픈 것일까. ‘마이스페이스’에서 만난 펜팔친구로부터 이모 문화를 접했다는 대학생 문영민(22) 씨는 “기성세대가 가졌던 우울함과 근본은 그리 다를 바가 없다”며 “슬픔과 좌절을 하나의 ‘놀이’로 여기는 것이 이 문화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모 키즈의 감성 실험은 ‘무성(無性)주의’까지 내디뎠다. 예쁘장한 남성 이모 키즈, 반대로 신경질적인 여성 이모 키즈 등 구분이 없을 정도로 남녀 모습이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이로 인해 동성애, 커밍아웃도 ‘해서는 안 될 것’이 아닌 ‘감정에 충실한 행동’이라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이모 키즈를 남성, 여성이 아닌 ‘제3의 성’, ‘제3의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들이 특별한 존재라기보다 이들의 감성을 받아 줄 만큼 사회가 변했다는 데 초점을 모으고 있다. 연세대 황상민(심리학) 교수는 “이모 제너레이션의 행동양식은 이들의 감성내용에 좌우되기보다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그간 우리 사회가 개인의 미세한 감정 표출을 외면해 온 것이 사실”이라며 “이모 키즈의 다양한 감정 표현을 반사회적이라 평가하는 것보다는 음악, 영화, 문학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와 접목시켜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