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고종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 지난해 해체한 광화문은 목조 건축물이 아니었다.
문 있는 석축 위의 2층짜리 문루는 목조를 흉내 낸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공포(처마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춰 댄 나무쪽), 서까래, 기둥, 천장 등 응당 나무여야 할 부재(部材·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여러 재료)가 모두 콘크리트였다.
해체 후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인근에 전시 중인 이들 부재를 보면 ‘콘크리트로 목조를 이렇게 흉내 낼 수도 있구나’라고 혀를 내두르게 된다.
콘크리트 광화문이 태어난 사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7년 광화문은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을 가린다며 헐린 뒤 경복궁 건춘문 북쪽(현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으로 옮겨졌다. 비운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석축만 남고 불타 없어졌다.
1968년 3월 15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콘크리트 광화문 공사가 시작됐고 그해 12월 완성됐다. 당시 목재를 전혀 쓰지 않은 건 정부가 녹화를 위해 벌채를 금지했기 때문. 이때 세워진 광화문은 원래 자리보다 14.5m 뒤로 밀렸고 경복궁의 중심축보다 약 5.6도 동쪽으로 틀어졌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005년에는 박 전 대통령이 쓴 광화문 한글 현판을 교체해야 한다는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의 발언 이후 홍역을 치렀다. 문화재위원회가 광화문을 복원한 뒤 현판 교체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해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문화재가 정치 논쟁에 휘말린 안타까운 광경을 봐야 했다.
마침내 2006년 원래 위치로 광화문을 복원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지난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광화문 터를 발굴한 결과 창건 때 유구(遺構·건축물 흔적)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쁨도 잠시. 지반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이 유구를 없애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학계를 달궜다. 올해 2월 유구를 땅속에 보존하고 그 위에 광화문을 복원하기로 하면서 논란은 마무리됐다.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1926년 8월 동아일보에 헐려 가는 광화문을 한탄한 칼럼이 실렸다. 당시 광화문 철거에 반대한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광화문을 잃으면 서울의 중심을 잃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광화문의 한이 복원이 마무리되는 2009년엔 풀렸으면 좋겠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