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나는 그 많은 친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문화대혁명과 톈안먼 사태, 뒤이어 물질만능주의 세상, 그리고 자본의 힘이 몰고 온 지금의 거대한 태풍까지. 중국의 예술가들이야말로 무수한 희생이 켜켜이 쌓인 변혁의 시대, 그 처참한 지형을 온몸으로 통과하면서 살아남은 ‘강한 자’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억압과 금기라는 시대의 불운과 고통을 자양분 삼아 미술가들이 피어올린 ‘꽃’은 중국의 경제대국 부상과 맞물려 바야흐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블루칩 대접을 받고 있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금세 흘러넘칠 듯한 얼굴들(장샤오강), 하얀 이를 모조리 드러내고 웃는 사람들(웨민쥔)…. 해외시장에서 열광하는 작품들은 이처럼 풍자와 냉소를 등뼈로 삼은 사회의식 짙은 그림이 대부분이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탕즈강전이나 어반아트에서 마련한 인쥔, 인쿤 형제전 등도 비슷한 맥락에서 중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주는 전시다. 그런데 이런 계열의 회화만이 중국 현대미술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는 작품이 요즘 서울을 속속 방문하고 있다.
처음엔 전시장을 잘못 찾아든 줄 알았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표화랑에 걸린 왕커쥐(52)의 대작들을 본 첫 느낌이 그랬다. 이른 봄의 여린 신록과 옥수수 밭, 웅장한 산봉우리와 활짝 핀 체리꽃…. 시적인 풍경화들은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정치색 강한 중국 현대미술과는 사뭇 달랐다.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왕커쥐는 드넓은 중국의 사계를 율동적 붓질과 세련된 조형감각, 오묘한 색상으로 빚어내 본토에서 명성이 높다. 실경을 토대로 하면서도 사실적 묘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의 속내를 읽는 그림들. 바람에 풀잎이 눕는 소리, 질박한 흙냄새가 담긴 듯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그의 유화에는 필법이나 구성에서 중국 산수화의 전통이 스며 있다.
중국 미술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확인하는 전시는 이것만이 아니다.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는 인간의 삶과 성애를 형상화한 런샤오린(45)의 몽환적 그림이, 공근혜갤러리에서는 천뤄빙(38)의 미니멀한 추상화들을 볼 수 있다. 이들도 어김없이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 일상과 초현실의 세계가 포개진 런샤오린의 그림에선 옛 중국 문인화의 표현이 배어나온다. 전통 수묵화를 전공한 천뤄빙은 간결한 형태와 구성, 여백의 여운 등에서 ‘중국 수묵화의 형이상학적 이점’을 살려낸다. 이들은 회화의 근원을 응시하고 탐색하는 점에서 닮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왕커쥐는 뼈있는 말을 했다. “외국인들은 중국의 현대미술을 마치 관광 기념품 대하듯 한다. 예술성을 따지기에 앞서 지역의 특성에 더 관심을 둔다. 작품의 감상도 구입도 그런 식이다.” 사실 ‘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국 미술에 대한 세계시장의 구애가 꼭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은 아니다. 런샤오린의 작품 해설을 쓴 평론가 펑보이는 “일부 예술가는 사회 변혁의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와 현상에 대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의문을 제기하였고 동시에 그들은 변혁 과정의 수익자이기도 하다”고 꼬집는다.
부조리한 예술계의 내막을 풍자한 프랑스 작가 마르탱 파주의 소설 ‘빨간 머리 피오’에서 나오는 한탄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지난 수세기 동안 예술에서 저주란 검열당하고 추방되는 것이었어. 그런데 오늘날엔 예술에서의 저주란 사랑을 받는 것인가 봐.” 어찌 중국 예술가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겠는가.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지 결국 나를 강하게 만든다.” 니체의 말은 개인에게도, 한 국가에도 적용이 가능해 보인다. 정치색이 짙든, 회화의 순수성을 파고들든 중국의 현대미술은 온갖 것이 뒤섞인 황허 강처럼 흐르며 다양하고 다채롭게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가공할 만한 것이 어찌 중국의 군사력과 경제력만일까.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