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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26년 日박열-가네코 사형 언도

입력 | 2008-03-25 03:00:00


“앞으로 나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아닌 ‘금자문자’로 불러 달라.”

20대 일본인 여성의 당당한 목소리가 법정을 타고 울려퍼졌다.

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였다. 그리고 조선인 아나키스트인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였다.

1903년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무적자(無籍者)가 돼 학교도 못가며 비참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 고모가 그를 양녀로 입양하기 위해 데려가지만 거기서도 차별을 받으며 살게 된다. 여기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고통과 자신의 처지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그는 뒷날 일본제국의 국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며 자신의 조선행이 축복이었다고 회고했다.

1919년 다시 일본에 돌아온 그는 도쿄(東京)로 옮겨가 주경야독을 한다. 거기서 아나키스트들과 어울리게 되고 조선인 아나키스트였던 박열과 사랑에 빠진다. 이들은 아나키스트 단체인 ‘불령사’ 등을 만들어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 타도 투쟁을 계속 벌인다.

그러나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보호검속을 구실로 잡혀 들어간 이들은 ‘천황 폭살 계획’의 누명을 쓰고 대역죄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들은 성사도 불투명한 혐의를 받게 되지만 재판정을 ‘투쟁의 장’으로 삼아 사건을 조작한 국가권력에 항의하고 죽기로 결심한다.

재판 과정에서 일본 당국은 천황제를 비판하는 그를 전향시키기 위해 7차례나 설득한다. 특히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박열과 가네코를 떼어놓으려 했다. 가네코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1926년 3월 25일 가네코와 박열은 사형 언도를 받았다. 둘은 옥중 결혼식을 올렸다. 일본 당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마하고 천황의 자비를 과시하기 위해 형량을 무기로 감형했다.

그녀는 같은 해 7월 23일 의문의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일본인임에도 천황제와 일본제국주의에 온몸으로 항거하다 스러진 가네코는 재판 과정에서 ‘삶에 대한 자각’이 자신을 이끌었다고 토로했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사상은 다른 사람이 심어준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체험에서 생겨났습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