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야성의 시절이 있었다. 남자 중학교. 센 놈이 대접받는 마초들의 세계에서 나 역시 거친 입담과 붉으락푸르락 다혈질 성미로 젠체했다. 메이저리거로 치자면 이반 로드리게스나 폴 로두카와 의형제를 맺어도 좋을 듯한 ‘땅딸보’ 체형도 후광이 되어 주었다.
무엇 때문에 시비가 붙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주먹을 먼저 낸 쪽은 나였는데 녀석은 잘도 피했다. 딱 한대를 맞고 수업 시작종과 함께 1라운드는 종료됐다. 수업 시간 45분 동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파서 그런 것인지 창피해서 그런 것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얼굴 한 부위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1교시가 끝나고 2라운드에 돌입한 것은 큰 실수였다. 그 다음 45분 동안은 그 녀석과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복싱을 배우고 있었다.
○두근두근
전날까지도 의연함을 유지했다. “유니폼을 준비하겠다”는 국가대표팀 천인호(49) 감독의 말에 “기왕이면 예쁜 걸로 해 달라”는 농담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자 복싱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천 감독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일단 선수들한테 살살 때리라고는 얘기해 두셨죠?” “엥? 때리기는 뭘 때려요. 공격만 해요. 5분 정도 맘껏 두들겨 보세요.”
한시름을 놓으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선배 기자들의 공격이 이어진다. “유명우와 모 야구 선수가 술을 마시다가 내기가 붙었어. 유명우가 오른손을 묶어두고 한 판 벌이기로 한 거지. 결과가 어떻게 됐겠냐? 야구 선수가 큰 망신만 당했지.”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두근두근이다.
○링에 오르기 전
오후 3시. 태릉선수촌의 오후 훈련이 시작된다. 밴텀급 장광식(24)이 유니폼을 빌려줬다. 54kg인 선수가 입던 것이라 몸에 붙는 느낌이 강하다. 웰터급 김정주(27)가 “배는 재미있으라고 일부러 내민 건가요? 원래 나와 있던 건가요?”라며 놀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몸매 관리 좀 할 걸. 일단 마우스피스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컵에 붓고, 마우스피스 원형을 넣는다. 말랑말랑해진 마우스피스를 입안에 넣고 강하게 깨문다. 치아와 잇몸에 뜨거운 고무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치아에 밀착되어야 링 위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다.
몸풀기 체조와 가벼운 러닝으로 훈련이 시작됐다. 천 감독은 “복싱 선수는 춤꾼보다도 리듬감이 중요하다”고 했다. 훈련장에는 음악소리가 가득하다. 아예 이어폰을 귀에 꽂고 훈련을 하는 선수도 있다. 하지만 동작을 따라하기에도 벅차 리듬 따위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이제 줄넘기다. 잰 스텝으로 줄을 넘는 것은 일단 합격점이다. 이훈(40) 코치에게 “줄넘기만은 손색이 없다”는 칭찬을 들었다. 나도 선수들 만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무렵 선수들의 발놀림이 좌절감을 준다. 세계선수권 우승자 이옥성(27)은 “복싱은 주먹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발로 하는 운동”이라고 했다.
“발이 빨라야 상대를 속일 수 있고 주먹도 빨라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지그재그 스텝이지만 내가 3번을 밟을 때 이옥성은 8번을 밟는다. 날랜 발놀림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쉭쉭” 날 정도다. 이것은 정말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글러브를 낄 차례다. 복싱 글러브는 크게 5가지 종류가 있다. 샌드백을 칠 때 착용하는 것을 선수들은 백장갑이라고 부른다. 백장갑은 4온스짜리다. 경기용은 규정상 10온스로 통일되어 있다. 스파링시 경량급은 12온스, 중량급은 14온스짜리를 사용한다. 슈퍼헤비급과 같은 최중량급은 16온스.
무게가 나갈수록 좀더 푹신한 느낌이기 때문에 충격은 덜하다. 천 감독이 골라준 글러브는 16온스짜리다. 샌드백을 치면 칠수록 글러브가 더 무겁게만 느껴진다.
○링에 오르다
모든 스파링 경기가 끝나고 내 차례다. 상대는 페더급(57kg이하) 서동식(22). 서동식이 가드를 올린 상태에서 3분간 때리기만 하면 된다. 주먹을 날려도 서동식의 머리 앞에서 주먹이 멈추는 느낌이다. 위빙(상대 공격을 피하기 위해 머리와 윗몸을 좌우로 흔드는 기술)만으로도 십중팔구는 피한다. 오기가 생겼다. 공격만 하는데 1점은 내야하지 않을까.
“복부를 치면 상대의 다리가 무뎌진다”는 천 감독의 지시가 떠올랐다. 밀착해 있다가 옆구리를 때렸다. 서동식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15년간 나를 괴롭힌 복싱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순간일까. ‘충격을 줬구나’ 생각했더니 사전에 머리만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단다. 경기가 끝나고 딱 한 대만 때려달라고 부탁했다.
“정말요? 괜찮아요?”라는 물음에 두려웠지만 기왕 체험하는 것, 꼭 맞을 때의 느낌을 알고 싶었다. 가벼운 잽 한 방으로 합의를 봤다. “30% 정도의 수준으로 때렸다”고 했다. 결과는? 이래서 마우스피스가 필요한 것이었다. 내 복싱 트라우마는 당분간 계속될 듯싶다.
태릉=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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