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원래 뉴질랜드 시골에서 벌을 치며 먹고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모험은 나처럼 평범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1914∼1986)와 나는 한팀으로 1953년 5월 29일 세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어떻게 올랐느냐고? 그건 간단하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올라갔다. 에베레스트는 체력이 강한 사람이 오르는 게 아니라 오르고 싶은 사람만이 오른다. 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왜 산에 오르는지 명확한 답을 하긴 어렵다. 그저 많은 사람이 여전히 거기에 오르기 위해 갈 뿐이다. 내 유골을 내 고향 뉴질랜드 오클랜드 앞바다에 뿌려 달라. 나에게 영광을 안겨 준 산엔 그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
얼음산에 오르면, 느끼한 게 싹 가시죠
산꾼 박영석(45) 대장이 다시 등산화 끈을 졸라맸다. 거의 1년 만이다. 그는 지난해 5월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르다 오희준 이현조 두 대원을 가슴에 묻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이 꺼졌다. 가슴속은 온통 까만 숯덩이였다. “나를 데려가지 왜 하필 그들인가?”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미친 듯이 술을 들이켜며 꺼억꺼억 피울음을 울었다. ‘다시는 산에 가지 말자. 아예 영원히 은퇴해 버리자.’ 수없이 되뇌었다. 그래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렴풋한 새벽에야 겨우 의자에 휴지처럼 구겨지곤 했다.
“날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내 가슴속에 묻은 바로 그들이다. 난 여태껏 9명의 대원(셰르파 2명 포함)을 잃었다.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 이상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들은 늘 내 곁에 있다. 난 아직 희준이 현조와 같이 합숙하던 서울 월곡동 아파트에 그대로 살고 있다. 그들이 나한테 말했다. 형이 주저앉으면, 우리도 같이 끝나는 거라고. 그렇다. 난 그들을 봐서라도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
박 대장은 올가을에 다시 그 지긋지긋한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한다. 그에 앞서 다음 달(4월 16일∼5월 6일)엔 중국 쓰촨(四川) 성의 6000m급 두 봉우리에 오른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랑거만인(6294m), 다둬만인(6380m)에서 ‘에베레스트 몸 풀기’를 하려는 것이다. 대원은 박 대장을 포함해 모두 10명.
“해발 5000m 넘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신의 영역이다. 히말라야만큼 높지 않다고 우습게보다간 큰일난다. 산꾼들은 묵묵히 최선을 다한 뒤 무조건 신의 뜻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내달 中6000m급 원정…가을엔 다시 에베레스트 남서벽 도전
박 대장은 평지에 내려오면 거의 자동차를 탄다. 걷는 게 지긋지긋해서다. 하지만 온몸의 피가 끈적끈적해진다. 느끼해진다. 머릿속이 멍하고 도무지 사는 것 같지 않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그러다 히말라야에 오르면 다시 머릿속이 맑아진다. 그는 지난 세월에 1년 중 7∼8개월은 얼음 구덩이에서 살았다. ‘히말라야→남극→베링해협→히말라야→북극→히말라야’식으로 끊임없이 얼음산을 찾았다. 서울에 돌아오면 다시 떠나기 위해 스폰서를 구하러 다녔다. 1996년 안나푸르나 등정 땐 시흥에 있던 31평 아파트까지 처분해 버렸다.
“산꾼이 산에 가는 것은 직장인들이 회사에 출퇴근하는 거랑 똑같다. 일반인들이 직장을 그만두면 영 사는 맛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산에 못 가면 머리에 쥐가 나 안절부절못한다. 삶의 일부인 것이다. 난 산으로 떠나기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나 좋다. 정신없이 바쁘지만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힘든 줄 모른다.”
박 대장은 건망증이 심하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해 곧잘 오해도 받는다. 집 전화번호 생각이 안 나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손전화는 이미 수십 대 잃어버렸다. 요즘은 아예 책상 서랍에 놓고 다닌다. 그와 통화하기 쉽지 않은 이유다. 한때 현금카드로 돈을 빼면 현금이나 카드 중 하나는 꼭 두고 나왔다. 무려 1000만 원 가까이 날린 적도 있다. 고산병 때문이다. 해발 5000m가 넘는 산에 오르면 뇌세포가 조금씩 파괴된다. 전문가들은 ‘고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면 한동안 정자가 형성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두세 달 정도 그런다고 들었다. 하지만 난 특이체질인가 보다. 히말라야 정기를 받고 태어난 아들이 둘씩이나 있으니까 ㅋㅋ. 사실 내 머리가 엉망인 건 맞다. 손가방도 목에 둘러매지 않으면 언제 잃어버릴지 모른다. 내 몸무게가 76kg쯤(174cm) 되는데 설산에 한 번 올랐다가 내려오면 60kg으로 확 졸아든다. 긴장과 스트레스 탓이다. 1년 가까이 히말라야에 가지 않았더니 요즘 기억력이 조금 좋아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언제 또 도질지 모르니까….”
박 대장은 요즘 갈수록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낀다. 걸을 때마다 관절에서 소리가 나고 어깨도 안 좋다. 왼쪽 눈 밑 얼굴뼈엔 쇠못을 3개나 박고 산다. 1991년 히말라야 남서 루트로 오르다가 150m 낭떠러지로 떨어져 생긴 흔적이다. 이젠 산이 점점 무서워진다. 젊었을 땐 깎아지른 절벽도 겁나지 않았다. 1993년 에베레스트에서 발을 헛디뎌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적이 있다. 그때 20∼30분 동안 어린애처럼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산에서 인간은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다.
먼저 간 대원들 목소리 귓전 맴맴
박 대장은 신에게 운명을 모두 내맡긴다. 신에게 굳이 정상에 꼭 오르게 해 달라고 빌지 않는다. 대신 제발 무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베이스캠프에 있으면 히말라야에서 죽은 대원들이 ‘소주 한잔하자’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랑 같이 있어 줘’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슴이 먹먹하다. 신의 허락(좋은 날씨)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은 피가 마른다. 대원들도 신경이 칼날 같다. 서로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붉게 물든 설산을 바라볼 뿐이다.
가끔 셰르파들도 속을 썩인다. 산소가 희박한 7000m 넘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박 대장 앞에서 시위를 한다. 이럴 땐 박 대장도 담배를 피워 문다. 뻑뻑 세게 빨아야 겨우 탄다. 몇 모금 빨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별들이 우르르 뜬다. 그래도 시침 뚝, 아무렇지도 않은 체한다.
“저 흐르는 강물처럼/멋없이 멋없이 살았죠/흘러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얼마나 좋을까 좋을까./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박 대장의 노래방 18번은 ‘바보처럼 살았군요’다. 가끔 혼자 미친 듯이 불러댄다. 허리와 목을 뒤로 활처럼 제치고 피를 토하듯이 부른다. 땀이 비 오듯 흘러도 아랑곳없다. 언뜻 눈에 물기가 어린다. 뭐 그리 바보처럼 살았을까. 그는 외롭다. 그래서 자유롭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박영석은:
▶199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2001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정 ▶2002년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 ▶2005년 북극점 도달 세계 3극점 등정, 산악그랜드슬램 달성 ▶2006년 에베레스트 횡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