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바닷가에서는 동백꽃이 절정이었다. 지리산 자락 산수유 마을과 섬진강변 매화마을에는 관광버스가 줄을 이었다. 매화가 지면 벚꽃이 핀다. 화개장터에서 하동 쌍계사로 가는 십리 길은 벚꽃이 무더기 무더기로 봉오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귀향(歸鄕)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도 상춘(賞春) 관광객들이 들르는 명소가 됐다. 주차장에는 관광버스 6대가 서 있었다. ‘노사모’와 개성고(구 부산상고) 동문회가 내건 플래카드가 눈에 많이 띄었다.
낮 12시경 노 전 대통령이 넥타이를 매지 않은 콤비 차림으로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함께 나타나자 200여 명의 관광객 사이에서 환호가 터졌다. 노 전 대통령은 “점심때가 되었는데 식사는 물론이고 차 대접도 못해서 미안합니다”라고 인사말을 꺼냈다. 그는 “오전 9시에 회의를 하는데 사람들이 ‘대통령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눈 딱 감고 안 나왔습니다. 현직이든, 전직이든 대통령의 사생활은 방어돼야 하는데, 마을까지 찾아오셔서 때론 힘들고 부담스럽습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관광객들과 10분가량 대화를 나누고 들어가자 비서관이 “오늘 여러분이 대통령과 만나는 장면은 ‘사람 사는 세상’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필자도 사진을 확인했다). 김해시에서 봉하마을에 세운 관광센터의 여직원은 “방문객이 평일에는 3000명, 주말에는 1만 명가량”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 생가에서는 기념 수건과 휴대전화 고리를 팔았다.
5년 임기 復棋하며 “人事잘못”
봉하마을에서 출생한 노 전 대통령은 동네 처녀와 결혼해 큰아들(건호)을 이곳에서 낳았다. 최진 씨는 저서 ‘대통령 리더십 총론’(법문사)에서 “노 전 대통령 자서전이나 전기물에는 ‘가난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반항심리를 가졌다’는 대목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지적한다. 생가 앞에 서 있는 안내문에도 “6세 때 천자문을 외우고 써 별명이 ‘노천재’였다. 가난해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다”고 쓰여 있다.
모친은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아들을 수태하고 “할아버지가 준 백마를 타고 달리는데 말발굽 소리가 우렁찼다”는 내용의 태몽을 꾸었다(안내문). 노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40여 호 동네에서 “가난과 친척들의 박대, 동네 유력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면서 한이 맺힌 여인”(노무현 자전적 에세이)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의 귀향은 어쩌면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나온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귀향한 전직 대통령은 ‘스토리가 있는 관광 상품’이 돼 있었다. 현직 시절 ‘유별난’ 언행을 보였던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도 주목거리다.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내려와 5년 임기를 복기(復棋)하는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청와대 인사가 잘못됐었다”는 만각(晩覺)을 했다고 측근은 전했다. 그는 “언론(대언론 관계)과 정무(政務)에서 실패했다. 불필요한 긴장감을 유발한 측면이 있다. 주변에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고, 그 정보를 근거로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회한을 전해 준 측근은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할 수는 없고, 시일이 흐른 뒤에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386 강경파 비서들을 기용한 것도 결국 대통령이고, 그들의 말에 무게를 실어 정책에 반영한 것도 대통령이다. 퇴임 4개월여를 앞두고 대못질했던 기자실이 새 정부 들어 부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친절한 봉하 분들 조심하는 빛도
봉하마을 사람들은 친절했으나 말을 조심하는 빛이 역력했다. ‘노무현 타운’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이어지면서 생긴 현상 같았다. 질문이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입을 닫았다. 인구 3만 명의 진영읍에 들어선다는 255억 원짜리 문화센터와 봉하마을 뒤 ‘봉화산 웰빙 숲’ 조성에 국가 예산이 지원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영읍 사람들은 노 전 대통령의 귀향 선물 덕에 문화생활을 누리고 웰빙 숲에서 산책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사슴 20마리와 공작 거위 오리 토종닭이 노니는 노건평(노 전 대통령의 형) 씨의 작은 농장을 구경하고 봉하마을에서 2000원짜리 국수로 점심을 때웠다. “아직 준비가 덜 돼 사 먹는 것도 변변찮을 겁니다”라는 노 전 대통령의 말과 달리 가격에 비해서는 먹을 만했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