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전 정무1장관이 2000년 정계를 떠난 지 8년 만에 다시 뉴스메이커로 등장했다.
자신의 돈을 갚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박 전 장관이 자금을 차명 관리해 오던 지인들을 잇달아 고소한 것이 계기였다.
●'1000억 대 비자금' vs '100억 대 재단 설립기금'
박 전 장관은 지난해 7월 "170억여 원을 돌려받지 못했다"며 서울 모 대학 K(47·여) 교수와 가족 등을 경찰에 고소했다. 또 같은 달 전직 은행 지점장 출신인 서모(67) 씨도 고소했다. 6억여 원의 정기예금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다. 모두 차명계좌로 관리되던 돈이다.
박 전 장관의 옛 보좌관이었던 김모(58) 씨도 최근 "100억 원 가까운 박 전 장관의 돈을 관리했다"고 폭로했다. 이 역시 차명계좌로 관리됐다.
여기에 박 전 장관의 처남인 현모(55) 씨는 "매형이 횡령당한 돈의 일부는 내 돈"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박 전 장관의 부인 현경자(60) 전 의원도 200억 원대의 자금을 따로 관리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같이 거론된 '박철언 비자금'의 액수는 대략 500억 원 안팎. 일각에서는 1000억 원대에 이를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박 전 장관은 이 같은 의혹을 부인했다. 횡령당한 금액을 다 합쳐도 200억 원대에 불과하고 원금은 100억 원 정도라는 것. 모두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박 전 장관은 "법조인 생활을 하며 모은 돈과 물려받은 재산 그리고 지인들이 아무런 대가없이 건넨 지원금"이라며 "모두 통일관련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모은 돈"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김영삼 정부 때 정권 차원에서 몇 번이나 나를 조사했지만 아무 것도 나온 게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자금 관리인 중 1명은 28일 기자에게 "그런 돈이라면 왜 굳이 차명으로 관리를 했겠나. 돈 나올 데가 기업 말고 더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버림받은 충신' vs '배신당한 주군'
박 전 장관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사람들은 모두 그와 가까웠던 가족이나 친구, 보좌관이다.
보좌관 출신 김 씨는 박 전 장관의 경북고, 서울대 후배. 박 전 장관과 연을 맺고 1988년부터 3, 4년 간 보좌관으로 일했다. 박 전 장관의 사조직이었던 '월계수회' 관리도 맡을 정도로 최측근으로 알려졌다.
은행 지점장 출신 서 씨도 박 전 장관과 경북중고교 동기동창이다. 그는 돈 관리 뿐 아니라 부인 현 씨가 총선에 나왔을 때 직접 나서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서 씨는 "머슴살이 끝나면 주인이 한 살림 차려주는 것이 우리 관습"이라며 "10년 넘게 돈 관리를 해줬는데 이제 와서 고소까지 한 박 씨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K 교수도 박 전 장관과 '각별한' 관계로 알려졌다. 박 전 장관은 1998년 자신이 운영하던 '포럼21 한일미래구상'이라는 단체를 통해 K 교수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들은 100억 원이 넘는 자금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독 K 교수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박 전 장관은 이들에 대해 "나를 배신하고 내 돈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박 전 장관의 고소 사건을 다음달 검찰에 넘길 것으로 알려졌다.
●"영부인 돈도 포함돼 있다?"
옛 보좌관 김 씨는 "예전에 박 전 장관이 수표 다발을 건네면서 '이 중에는 영부인(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것이 포함돼 있다'고 했었다"고 말했다.
김 씨의 이런 발언으로 박 전 장관이 차명으로 관리해 온 자금 중에 노 전 대통령의 돈이 섞여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아직 환수되지 않은 노 전 대통령의 추징금이 남아 있어 "그 돈을 추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현 상태에서 추징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박 전 장관이 차명 관리해 온 자금이 설령 불법적인 방법으로 받은 돈이라고 해도 공소시효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 씨의 말대로 박 전 장관이 "김옥숙 여사 돈이 맞다"고 인정하더라도 노 전 대통령의 돈은 아니기 때문에 추징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남=이성호기자 starsky@donga.com
이종석기자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