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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美베트남 ‘밀라이 학살’유죄평결

입력 | 2008-03-29 02:59:00


찰리 중대가 도착했을 때 적군은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마을에는 무장 게릴라 대신 젖먹이를 안은 아낙과 아이들이 평온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1월 베트콩은 대규모 도시 게릴라 전투를 감행한 ‘구정 공세(Tet Offensive)’로 승전을 의심하지 않았던 미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찰리 중대는 구정 공세에 가담했던 베트콩 제48대대의 은둔지를 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은둔지는 베트남 중부의 밀라이 마을, 암호명은 ‘핑크빌’이었다.

3월 16일 오전 24세의 윌리엄 캘리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가 밀라이 마을을 덮쳤다. 베트콩은 없었지만 중대원들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동조자’로 몰아세우고 총질을 해댔다. 강간과 남색(男色), 사지 절단, 시체 훼손도 자행됐다. 이날 오전 늦게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살해된 양민 수는 후에 504명으로 집계됐다.

사건 직후 미군은 밀라이 학살을 128명의 적군을 몰살시킨 승전으로 은폐했다. 하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이 하나 둘 이어졌다. 그리고 1969년 11월 시모어 허시 기자의 퓰리처상 수상작인 탐사보도로 미군의 대표적인 양민 학살 사건인 ‘밀라이 스토리’는 세상에 알려졌다.

미군은 윌리엄 피어스 장군을 단장으로 자체 조사위원회를 꾸려 장교 28명과 하사관 2명을 학살 연루와 사건 은폐 혐의로 기소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밀라이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캘리 중위가 유일하다. 캘리 중위의 혐의는 모두 4가지. 오솔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동양인’을 최소 30명 살해했고, 도랑에서 70명을 추가로 사살했으며, 이 도랑에서 도망가는 어린이 한 명을 죽이고, 손을 들고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남자에게도 방아쇠를 당겼다는 혐의였다.

1971년 3월 29일 장교 6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상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캘리 중위의 주장을 거부하고 어린이 살해 이외의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 평결을 내렸다.

며칠 후 캘리 중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3일 만에 석방돼 가택 연금됐다. 그는 1974년 10년형으로 감형된 데 이어 같은 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504명의 양민 학살로 시작돼 중위 한 사람의 유죄 판결로 끝난 밀라이 사건은 지금도 묻고 있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한 개인에게 묻는가.”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