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정권이 이명박 대통령 정부의 대북정책에 맹렬한 비난을 퍼붓고 나섰다. 놀랄 일은 못 된다. 오히려 그건 햇볕정책에 현혹돼 북한의 실상과 한반도 현실에 색맹이 됐던 인사들을 위해선 눈에 씐 콩깍지를 벗겨주는 치유적 교육적 효과도 있다.
무릇 ‘실용주의’ 정책이란 환상 아닌 현실, 있었으면 하는 현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 바로 현실의 ‘실상’에 접근함으로써 출발한다. 다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상 현실이란 가정이나 직장의 인간관계며 근린의 생활환경 등 극히 제한된 개인의 활동반경을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안다는 것은 대부분 남의 말을 듣고, 나의 직접경험이 아니라 남을 통한 간접경험에 의해 알게 된 것들이다. 소문과 신문, 라디오와 TV 그리고 잡지나 책자 등을 귀동냥 눈동냥함으로써….
그러나 사람은 그처럼 제한된, 단편적인 현실의 인식에 만족하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와 이른바 지식인은 부분적, 파편적인 현실이 아니라 전체적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현실의 총체성에 대해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까지 하고자 한다. 바로 현실의 전체성을 지향하는 세계상(像)과 세계관(觀)에 대한 추구이다. 과거엔 종교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다면 근래에 와선 이념(이데올로기)이 그 구실을 맡아주고 있다. 스피노자 투로 말하면 종교가 대중의 이념이라면 이념은 지식인의 종교다.
한반도 실상인식 ‘잃어버린 10년’
세계를 설명하고 세계를 이해시켜주려는 종교나 이념이 점차 독단화하는 것은 바로 그 교리가 세계의 실제적인 현실과 접촉을 상실한 도그마가 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몰락은 현실과의 접촉을 잃어버린 교조적 이념의 종말을 시위해준 역사적 예증이었다.
‘친북’ 정권이 들어선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들 하는 모양인데 적어도 대북관계에선 그것은 북의 실상, 한반도의 ‘리얼리티’와의 접촉을 잃어버린 10년이라 해서 빗나간 말이 아닐 듯하다.
우리는 하나가 아닌데 하나라 했고, 통일을 가장 두려워하는 북의 영주 앞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봉창(奉唱)했다, 저들은 핵무기를 밀조하면서 평화통일을 구가하고, 수틀리면 남쪽을 이젠 불바다가 아니라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다. 그러한 북과 남이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운 지난 10년, 그건 분명 북의 실상에 눈을 가리고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접촉을 잃어버린 10년임에 틀림없다.
도대체 500만 표 차라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고 당선된 대통령을 ‘매국역적’이라 한다면 장차 평양이 상대할 남한의 지도자는 누구라 믿고 있는 것일까. 그 반면에 아비로부터 세습된 권력을 북녘 민족을 대표하는 참된 지도자라고 믿어주는 ‘애국지사’들이 남한에는 널려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는 것일까.
협박을 안 해도 알아서 기어오기 때문에 협박을 안 했을 뿐, 그 사이 로켓포를 쏘아 올리고 핵폭탄을 실험해서 가일층 협박수단을 챙겨둔 평양이 이제 와 새삼 협박한다고 호들갑을 떨 것은 없다. 필요에 따라 평양과 협상을 하는 것을 두려워할 건 없지만 두려움 앞에서 협상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남북관계의 험난한 실상이 오랜만에 있는 대로 드러난 상황에 당황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남북관계가 겉모양만 화기애애했던 지난날의 환영에 미련을 가질 필요도 물론 없다.
과거 분단 상황에서 서독의 통독성은 1차적으로 동독의 현실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고 그러한 연구를 권장하며 그 결과의 계몽에 주력했다. 우리의 통일부는 북한의 실상을 연구 계몽하는 데 무슨 기여를 했는지. 혹여 평양의 실체보다 그에 관한 환상을 퍼뜨리는 데 일조하진 않았는지….
현실 바탕위에 남북관계 정립을
그러한 지난날을 돌아본다면 새 정부의 대북정책 출발은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든다. 북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의 바탕 위에 남북관계가 정립돼야 참된 진전이 있을 것이다.
결국 남쪽에서 못한 반공교육을 평양이 나서 이번엔 해준 셈이다. 4·9총선에 대한 영향도 괜찮을 것이다. 여당은 대선에서 지지해준 국민의 참뜻을 이해하고 야당은 친북 환상에서 깨어나는 데 다 같이 도움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