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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이동욱 前동아일보 회장

입력 | 2008-04-03 03:01:00

2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안암병원에 마련된 원로 언론인인 오헌 이동욱 전 동아일보 회장의 빈소에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원대연 기자


경제논설 명성… IMF경고 칼럼 화제

말년까지 신문과 함께 ‘올곧은 외길’

2일 타계한 오헌 이동욱(梧軒 李東旭) 전 동아일보 회장은 광복 이후 평생 ‘언론 외길’을 걸어 온 영원한 신문인이었다.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한 고인은 일본 와세다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일제강점기 말이던 1941년 졸업한 뒤 고향에서 “취직하기 싫어 광복 때까지 책만 읽으며 지냈다”고 한다. 1946년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가 ‘무상몰수-무상분배’로 토지개혁을 강행하는 도중 월남했다.

서울에 온 뒤 대학 선배인 설산 장덕수 선생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생전에 “194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을 때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이었던 이길용 기자가 광복 후 복직해 체육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월남 직후 한국민주당을 이끌던 인촌 김성수(동아일보 창립자) 선생을 만나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토지개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촌은 지주 출신이었으나 ‘우리도 농지개혁을 통해 새로운 삶의 틀을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의 장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북한 사회주의와 대결하려면 남한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지면에는 지주들의 반대를 누를 수 있는 진보적인 농지개혁에 찬성하는 글이 많이 실렸다.” (‘인촌 서거 50주년 추모집-인촌을 생각한다’)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을 때 동아일보는 다음 날 7일자와 8일자 사설에서 “카이젤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나치즘 체제를 겨냥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며 강력 비판했다. 주필이었던 고인은 중앙정보부가 당시 김상만 사장을 강제 연행하는 등 탄압을 가하자 천관우 이사와 함께 물러났다.

1975년 주필로 복직한 뒤 사장을 맡고 있던 1980년 11월 신군부에 의해 김상만 회장과 함께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국군보안사령부 지하실로 끌려가 동아방송 포기각서를 강요당했다. 두 사람은 두 시간여 동안 각서 작성에 불응했으나 각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동아일보사에 위해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휩싸여 ‘동아방송 허가와 관련한 일체의 권한과 기자재를 포기하고 이를 KBS에 양도한다’는 각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냉정한 현실 진단과 앞을 내다보는 경제논설로 유명했으며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1983년 동아일보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계 산업계 등에서 여러 차례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모두 물리치고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언론 한길’을 걸었다. 아흔 살이 넘은 최근까지도 국내 신문들과 뉴욕타임스 등 외국 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비교했던 ‘기자’였다.

특히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경고한 칼럼 등은 화제를 모았다. 1997년 9월 11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외환위기 대비하자’란 기고에서 “주식값이 떨어지고 환율이 치솟는 한국 상황이 1994년 멕시코나 1997년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의 외환위기와 유사하다”며 한국의 경제 지표들이 안정적이어서 괜찮다는 낙관론을 비판했다. 이 칼럼은 “한국도 기아사태 해법 여하에 따라서는 주가 폭락, 환율 폭등이라는 동남아 국가들의 도식에 빠져들지 않으리라고 장담 못한다”며 “국제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외채가 늘고 있는 한 외환위기는 항상 잠재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채주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전 동아일보 주필)은 “고인이 동아일보 주필을 맡고 계실 때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논설위원실에 갔더니 새뮤얼슨의 ‘경제학 원론’을 주면서 ‘경제담당 논설위원은 앞으론 경제만 알아선 안 된다. 노동, 복지, 환경 문제도 다각도로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다”면서 “4년간 논설위원실에 있으면서 학구열이 높았던 고인으로부터 받았던 학은(學恩)은 평생 잊을 수 없다”며 추모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