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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박철화]일상의 곁으로 온 문화예술

입력 | 2008-04-05 02:55:00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문화예술을 즐기고자 하는 욕구도 급속히 늘어난다. 공연장과 전시장에는 관객이 몰리고, 출판계의 어려움에도 문화예술 관련 분야의 도서와 정보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있다. 해외 유명 예술인의 공연·전시 유치는 이제 친숙한 일이 되었고, 심지어는 문화예술을 즐기려는 목적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일도 드물지 않다.

물론 고액 관람료에서 보듯 이러한 변화를 사회 양극화에 따른 부정적 현상이라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문화예술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풍요로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제공하는 게 옳지 않을까. 새 정부의 문화예술 관계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도 여기다. 경제성장의 몫이 모두에게 돌아가야 하듯 문화예술 또한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는 문화예술에 투자하는 ‘문화접대비’를 기업의 손비로 처리하는 제도를 마련했고, 서울시 역시 ‘2010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선정될 만큼 도시 전체의 공공디자인 혁신에 한껏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니 정책이 나아갈 방향은 정해졌다. 삭막한 도심에 물을 흐르게 만든 청계천에 국민들이 아낌없는 사랑을 보여 주었듯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정책 역시 뜨거운 성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문화예술 향유 능력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능력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즐기고 누려야만 갖출 수 있는 운동 능력과 마찬가지다. 운동 능력이 육체적 건강의 바탕을 이룬다면, 문화예술은 정신적 건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둔 성인이라 해도 체력이나 문화예술 향유 능력이 뒤처진다면 성숙하고 건강한 시민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체육이 학교라는 제도교육 속에 있어야 하듯, 문화예술을 즐기는 일 역시 일찍부터 국가가 지원하는 제도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한 예로 프랑스는 1960년대 후반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아이들의 문화예술 향유 능력이 달라져선 안 된다는 국민적 동의를 이뤘다. 그에 따라 매주 수요일을 모든 학생이 선생님과 함께 문화예술이나 스포츠·레저를 즐기는 날로 정하여 시행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경제적 소외만이 아니라 문화적 소외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경제적 소득을 넘어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 능력이야말로 신분을 가르는 시대가 되었다. 돈은 기회가 주어지면 벌 수도 있지만, 돈이 있다 해서 문화예술을 즐기는 능력이 하루아침에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문화 선진국이라 부르는 것도 책 읽기와 연극을, 오페라와 뮤지컬을, 전시회와 콘서트를 즐기는 일상 풍경 때문이 아닐까.

20세기는 정치와 경제의 시대였다. 그 세기의 한동안 우리는 고난을 겪었다. 물론 모두의 노력을 통해 성공적으로 빠져나왔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경제 강국의 이미지는 그 결실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문화예술은 국가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지식산업의 고부가가치를 좌우하는 자원이다. 선진국은 물론이고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경쟁국들이 앞 다투어 문화예술에 투자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우리가 뒤처져서는 안 된다. 부모에게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해서 아이를 문화예술 환경에서 소외시킬 수 없다. 졸부들의 국가가 아닌,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국가가 되기 위해서 아이들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문화예술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한다.

박철화 중앙대 예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