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박근혜 당’에서 ‘이명박 당’으로 탈바꿈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권력이란 그 속성상 나누어 갖기를 거부한다. 그것을 제도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것 중 하나가 집권세력 내의 당-청(黨-靑) 분리다. 그러나 그 정도의 느슨한 장치로 권력의 구심력(求心力)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한나라당 공천이 ‘친이(親李) 뺀 자리에 친이 넣고, 친박(親朴) 뺀 자리에 친이 넣고’ 하자 박근혜 전 대표는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박근혜의 남자들’이 우르르, 탈당을 해서 ‘친박연대’의 문패를 달았다. 문패의 주인은 “살아서 돌아오시라”고 했다.
‘아주 오래된 정부’
이번 총선의 숨은 하이라이트는 친박계(系)(당 내외를 포함해)가 과연 얼마나 살아 돌아오느냐에 있다. 친이계만으로도 안정 과반수가 된다면 박근혜 씨는 외로워질 것이다. 친박계를 포함해야 과반수가 되거나, 불안정한 과반(150석을 겨우 넘은 수)에서 여유로울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박 씨는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씨의 행불행(幸不幸)이 하이라이트라면 이건 정말 ‘이상한 총선’이다. 하지만 실망과 회의(懷疑), 무관심 등으로 사상 최저의 투표율이 예상되는 총선에서 그만한 볼거리 외에 달리 쓸 것이 무에 있겠는가. 한나라당 공천이 ‘줄서기 공천’이란 것쯤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고, 민주당 또한 ‘박재승(공천심사위원장) 혁명’이라고 요란했지만 기실은 ‘DJ(김대중) 색’ 좀 뺀 것 외에 별게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TK 대주주(大株主)’ ‘충청도 자존심’ 운운하며 그동안 어렵사리 눅여 왔던 지역주의까지 부추겼으니 도무지 이거다, 하고 신명 나 쓸 거리가 없다. 초점을 총선 이후로 옮겨 보자.
‘부자 내각’에 실망했다. ‘얼리 버드(early bird)’에 ‘노 홀리데이(no holiday)’라고 하지만 뭔가 졸가리 없이 부산한 것만 같다. 그러다 보니 출범한 지 달포밖에 안 된 이명박 정부가 ‘아주 오래된 정부’처럼 느껴진다.
대통령이 일선 경찰서로 뛰어가야 범인이 잡히고, 라면값도 대통령이 챙겨야 하는 정부라야 실용정부인가. 대통령은 “(청계천처럼) 대운하도 후딱 하는 줄 안다”고 고개를 젓지만 정부 측 움직임은 아무래도 후딱 해치우려는 것만 같다. 민심은 이래저래 편안치가 못하다.
총선 이후 이런 민심을 편안케 해야 한다. 경제 당장 못 살리는 게 대통령 탓이 아니란 것쯤은 국민도 안다. 민심이 원하는 것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정리하고 순서를 정해 차근차근 실행하는 것이다.
선거 때는 안정론이니 견제론이니 하며 시끄럽지만 표를 몰아줬다고 국정이 반드시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2004년 총선에서 여당은 과반수를 이뤘으나 민심에 반(反)하는 역주행을 하다가 몰락했다. 여소야대가 균형과 타협의 상생(相生) 정치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여대(與大)면 밀어붙이고, 야대(野大)면 발목잡기를 해온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결국 국회 의석수보다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것이다.
20세기 초 실용주의를 주창한 미국의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실용주의는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조화시키는 행복한 조화자”라고 했다. 유용성(有用性)을 중시하되 의견의 조화가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조화 없이 갈등만 키우는 의제(議題)는 피해야 한다. 그 어떤 도그마도 실용주의의 적이다. 과속 질주도 금물(禁物)이다. 사회공동체의 보편적 가치인 상식을 기반으로 다수 국민이 요구하는 과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다시 실망시키지 말라
예를 들어 공기업 민영화에 미적거릴 이유가 없다. 전문경영인 출신을 공모한다고 하는데 그런다고 ‘신(神)도 놀랄’의 공기업의 관행적 일탈(逸脫)을 근절할 수 있겠는가. 한반도 대운하의 경우, 대통령의 뜻이 그렇다면 청와대 및 정부 관계자의 말이 자꾸 다르게 나오지 말아야 한다.
비록 실망했다고는 해도 국민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마저 접은 것은 아니다.
총선 결과는 그러한 기대의 표명(表明),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총선 이후 국민이 가라는 길을 가야 한다. 다시 국민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
전진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