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국제법 위반을 알리기 위해 최초로 외국에 보낸 전보의 독일어 번역본. 사진 제공 정상수 명지대 교수
민철훈 독일공사관에 보낸 전보 번역본
정상수 교수 “국제법상 무효 입증할 근거”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국제법 위반을 외국에 알린 최초의 문서(긴급 전보)가 확인됐다.
이 전보는 을사늑약 강제 체결 3일 뒤인 1905년 11월 20일경 독일에 도착한 것으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외국 정부의 도움을 요청한 대한제국 최초의 문서로 평가된다.
그동안엔 고종 황제가 1905년 11월 26일 알렌 전 주한 미국공사에게 보낸 긴급전문이 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첫 문서로 알려져 왔다.
정상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4일 “국사편찬위원회가 복사한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외교 문서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고종이 당시 베를린 주재 공사관이었던 민철훈에게 보낸 전보의 독일어 번역본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전보의 우리 원본의 소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정 교수는 “민철훈이 ‘대한제국 황제가 보내 오늘 본인이 받은 전보 번역본을 외교부에 전달한다’는 편지를 남긴 점, 전보의 독일어 번역본에 당시 독일 외교부 하급 관리와 외교부 차관이 1905년 11월 20일과 23일 전보를 각각 확인했다는 자필 서명이 전보의 독일어 번역본에 남아 있다는 점 등으로 보아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 직후 이 전보를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고종 황제는 이 전보에서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후작을 조선 통감으로 임명하도록 짐을 압박하고 있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넘겨받으려고 한다. 이것은 국제법적 관점에서 용납이 안 된다”며 “귀하(민철훈)는 촌각을 다퉈 이러한 급박한 위기에서 황실과 대한제국이 시급히 벗어나 독립이 보장되고 국제법이 상실되지 않도록 독일 정부에 도움을 요청해 달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국제법상 조약 체결 직후 항의나 반대의사를 표시하면 조약의 무효가 성립된다는 게 국제법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라며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무효임을 주장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번역본을 살펴본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을사늑약의 국제법상 무효를 고종 황제가 처음 제기한 문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큰 사료”라면서 “특히 그 첫 문서를 미국이 아니라 독일에 보냈다는 것은 고종이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은 미국보다 러시아와 가까운 독일이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