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박초희 기자
《2005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빨간 모자의 진실(Hoodwinked)’. 독일 그림(Grimm) 형제의 원작동화를 살짝 비틀어 놓은 이 영화는 참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방식을 보여줍니다. 도난사건의 진실을 둘러싸고 등장인물마다 엇갈리는 진술을 늘어놓으면서 사건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지기 때문이지요. 사실 ‘빨간 모자…’의 이런 독특한 화법은 1951년 세상에 나온 한 일본 영화에서 이미 시도되었습니다. 일본 최고의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1910∼1998년)의 대표작 ‘라쇼몽(羅生門)’이 그것이지요.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끔찍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두고 서로 다른 주장을 들려줍니다. 무려 54년이란 세월의 간극을 둔 두 영화는 공교롭게도 우리에게 이런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자, 그럼 먼저 영화 ‘빨간 모자의 진실’을 들여다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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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벌어진 사실…사실… 그것들이 곧 진실일까
[1] 엇갈리는 진술=“사실(fact)은 여러 개다”
숲 속 평화로운 마을에서 도난사건이 발생합니다. 최고로 맛난 케이크를 만드는 ‘퍼켓’ 할머니의 요리비법이 담긴 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지요.
개구리 수사반장이 사건 해결을 위해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이윽고 유력한 용의자 4명이 불려옵니다. 그들은 퍼켓 할머니의 손녀 ‘빨간 모자’, 신문기자인 ‘늑대’, 무지막지한 터프 가이 ‘도끼맨’, 그리고 요리책의 주인인 퍼켓 할머니였죠.
그들은 하나같이 “난 결백하다”고 주장하면서 사건이 벌어진 순간 자신들이 목격한 사실을 다음처럼 진술합니다.
①빨간 모자=“늑대가 할머니를 꽁꽁 묶어서 창고에 가뒀어요. 할머니의 탈을 쓴 늑대는 저를 잡아먹으려고 했죠. 바로 그 순간, 도끼맨이 나타나서 마구 도끼를 휘둘렀어요.”
②늑대=“숲 속에서 잇따라 일어나는 도난사건의 범인이 빨간 모자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빨간 모자를 잡기 위해 저는 할머니로 변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죠. 근데 느닷없이 도끼맨이 나타나 도끼를 휘둘렀어요.”
③도끼맨=“제가 무좀약 광고 모델로 뽑혔습니다. 사람들에게 뭔가 야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도끼 휘두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얼떨결에 사건 현장에 다다르게 된 거예요.”
④퍼켓 할머니=“저는 사실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 마니아입니다. 스키를 타고 절벽을 내려오다가 낙하산을 펼쳤어요. 근데 낙하산 줄이 엉키는 바람에 온몸이 절로 꽁꽁 묶였어요. 산등성이를 대굴대굴 굴러 내려오다 집안 창고에 스스로 갇히고 말았죠.”
자, 이들 중 거짓말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요리책을 훔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2] 밝혀지는 진실=“진실(truth)은 오직 하나다”
신기하게도, 거짓말쟁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용의자 모두가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할머니의 요리책을 훔쳐간 범인은 누구였나요? 이들 용의자에겐 죄가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평소 순진하게만 보이던 털북숭이 토끼가 진범이었습니다! 마을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토끼는 그 연약한 외모 속에 무시무시한 흑심을 숨긴 채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죠. ‘토끼가 범인이다.’ 바로 이것이 사건의 ‘진실’이었습니다. 개구리 수사반장은 용의자들이 늘어놓는 서로 다른 진술 속에 공교롭게도 토끼가 모두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했고, 결국 털북숭이 토끼가 범인이라는 ‘진실’을 밝혀내었죠.
여기서 우리는 소중한 깨달음에 다다릅니다. ‘사실’과 ‘진실’은 때론 같지 않다는 점을 말이지요.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보는 이에 따라 ‘사실’은 여러 개의 버전(version)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실’은 여러 개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진실’은 ‘참되고 변치 않는 영원한 이치’란 뜻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무서운 살인마가 도끼를 들고 나를 쫓아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도끼 살인마에게 쫓깁니다. 궁지에 몰린 나는 살인마를 향해 이단옆차기를 날립니다. 살인마는 발차기를 맞고 쓰러져 죽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집 아줌마가 막 문을 열고 나오다가 이단옆차기를 날리는 나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옆집 아줌마는 경찰서에서 나를 살인범으로 지목할 것입니다. 살인마가 먼저 도끼를 들고 달려온 ‘사실’을 아줌마는 보지 못했으니까요. 따라서 아줌마로선 내가 살인범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어떨까요? ‘살인마가 나를 죽이려 해서 정당방위를 한 것’이 바로 사건의 진실입니다.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선 옆집 아줌마뿐 아니라, 사건을 처음부터 지켜본 더 많은 목격자의 진술이 필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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