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바쳐 쓴 책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두 교수의 노작(勞作)이 지인과 후손의 노력으로
최근 나란히 나왔다. 국어학자인 고(故) 신기철 전 성균관대 교수의 ‘한국문화대사전’(전 10권·한울터)과
역사학자인 고 송준호 전 전북대 교수의 ‘조선시대 문과백서’(전 3권·삼우반)다.
두 저작은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다. 신 교수와 송 교수는 각각 20년, 30년 넘게 해당 저서를 쓰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나 생전에 예산 문제 등으로 책을 펴내지 못했다.
두 교수가 같은 해(1922년)에 태어나 같은 해(2003년)에 세상을 떴다는 공통점도 눈길을 끈다.》
▼‘우리 문화 집대성’ 13만장 원고 사후 햇빛▼
故 신기철 교수의 ‘한국문화대사전’
서영훈 씨 등 지인들이 출판비 모금
춘천고 출신인 신기철 교수는 춘천고 학생들이 1937년 결성한 항일 결사조직 ‘상록회’에 가담했다가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신 교수는 광복 후 1948년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강단에 섰으나 1950년대 초 교편을 접었다. 사전 편찬에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신 교수의 오랜 지인인 서영훈(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한우리공동선실천연대 이사장은 “신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우리 민족의 발전은 우리 언어와 문화를 올바로 지키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해 사전 편찬을 일생의 업(業)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신 교수의 첫 저작은 1959년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이었다. 이어 1975년 ‘새우리말큰사전’을 출간한 직후 ‘한국문화대사전’ 집필을 시작했다. 2000년 원고 대부분을 탈고했지만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책을 펴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신 교수는 200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도서관에서 북한 쪽 자료를 찾다가 쓰러진 뒤 책 출간을 보지 못한 채 2003년 눈을 감았다.
그 뒤로도 책이 나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서 이사장이 KBS 사장일 때 KBS문화사업단에서 이 사전을 간행하기로 했으나 사업단이 1990년 EBS로 분리 독립되는 바람에 발행 계획이 중단됐다. 출판사들은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생전의 신 교수에게서 사전 간행을 위촉받은 서 이사장 등 지인들은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이들은 2001년 부영건설로부터 출판비를 얻어냈고 이어 STX, 문화관광부로부터도 지원을 받아 사전을 출간했다. 신 교수가 쓴 13만 장의 원고가 마침내 빛을 본 것이다.
사전은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예술 풍속 등 14개 대분류 아래 표제어 6만5000여 항목으로 이뤄졌다. 화보집을 별도의 권으로 구분한 것이 특징. 박갑수 서울대 명예교수는 “백과사전은 대개 여러 명이 공동 집필을 하기 때문에 잡다하게 나열된 사전식 기술에 그친다”면서 “이 사전은 신 교수 한 분이 집필해 전편에 걸쳐 일관된 견해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책을 펼치다 보면 본문 앞의 첫 장에 ‘그리운 아버님’이라는 제목의 글이 눈에 띈다. ‘불효자 상윤, 상대, 상진, 미망인 이용월’이 쓴 이 글에는 “아버님 평생의 숙원사업이었던 한국문화대사전이 발간되어 영전에 바칩니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한우리공동선실천연대는 7일 오후 6시 반 서울 중구 을지로1가 프레지던트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과거 급제자 총정리’ 韓美학자 미완의 작업 완성▼
故 송준호-와그너 교수 ‘조선시대 文科백서’… 유족들이 마무리
조선시대 과거시험 가운데 문과(文科)는 태조 2년에 처음 실시돼 고종 31년까지 모두 748회가 치러졌으며 급제자는 1만4607명이다. 748회 시험의 기록을 모두 찾아 급제자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작업이다.
여기에 손을 댄 학자가 있었다.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북대 원광대 교수, 미국 하버드대 객원 교수와 연구 교수를 지낸 송준호 교수다. 그는 1966년 평생 친구이자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권위자인 에드워드 와그너 전 하버드대 교수와 함께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朝鮮文科榜目)’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두 학자는 합격자뿐 아니라 친인척까지 10만여 명의 출생과 사망 연도, 본관, 출신지, 거주지, 최고 관직 등의 정보를 꼼꼼히 살폈다.
30년 넘는 조사를 끝내고 원고 집필을 하던 도중 와그너 교수가 2001년, 송 교수가 2년 뒤인 2003년 세상을 떴다. 송 교수의 셋째 아들인 송만오(49) 전주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가 유업(遺業)을 이었다.
송만오 교수가 작업을 이어받았을 때 합격자에 대한 기본 정보는 모두 입력이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748회의 시험이 언제, 어떻게 실시됐는지 등을 소개하는 설명문은 50개 정도만 완성돼 있었다.
송 교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타계한 두 교수의 원문을 최대한 살리면서 작업을 마무리했다. 고 와그너 교수의 부인인 김남희 여사는 하버드대 옌칭연구소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도록 도움을 줬다. 아들은 책의 첫 장에 ‘이 책을 와그너 교수님과 아버님의 영전에 바칩니다’라고 썼다.
학계는 이 책을 조선의 엘리트 계층 연구에 크게 기여한 저작으로 평가한다. 급제자들의 신상 기록뿐 아니라 광해군 8년 때 시험감독관이 문제를 지인들에게 사전 유출해 물의를 빚었던 일, 인조 4년에 시험감독관이 부정한 방법으로 친지들을 합격시켜 급제자 전원의 합격이 취소된 일 등 과거시험에 얽힌 일화들에 대한 기술도 눈길을 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