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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년-사랑의 詩]김종삼/‘비옷을 빌어 입고’

입력 | 2008-04-11 02:59:00


하루 종일 비 내리는 날, 가까운 데서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그 사랑스러운 멜로디를 따라 지나간 추억들이 하나 둘 번져온다. 아주 오래전 개성(開城)에서 만났던 한 여고생을 향한 사랑과 실연의 기억이 빗속으로 번져가고, 비옷마저 빌어 입고 다녔던 가난의 기억도 빗소리를 따라 흘러간다. 그때도 담쟁이가 우거진 기숙사의 기와 담장 위로 하루 종일 비는 내리고 트럼펫 소리가 들렸던가.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비를 타고 흘러 번지는 아름다운 소품이다.

김종삼은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일관되게 쓴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그는 스스로 “나의 직장은 시(詩)”(‘제작’)라고 하였고, 자신은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준 일밖에 없다”(‘물 桶’)면서 가난한 고백을 이어갔다.

연애시에는 한없이 인색했던 그는 “나의 연인은 내가 살아가는 날짜들”(‘연인’)이라고 했을 뿐인데, 바로 그가 월남하기 전 잠깐 마주쳤던 ‘첫사랑’을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구체성으로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비옷을 빌어 입고 다니던 28년 전 개성의 호수돈 고녀(高女), 기억 속의 그곳에서는 아마 지금도 비가 내리고 사랑스러운 트럼펫 멜로디가 환청(幻聽)처럼 들리고 있을 것이다.

한때 개성의 호수돈 고녀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박완서 선생은 그 학교가 “화강암으로 지어진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제는 건물만 남아 있다는 그 아름다운 학교를 감싸면서 ‘비’와 ‘첫사랑’과 ‘실연’과 ‘트럼펫 소리’의 기억이, 김종삼의 가장 아름다운 시편의 제목이기도 한 ‘묵화(墨畵)’처럼, 적막하게 번져가고 있다.

유성호 평론가·한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