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이 8일 잠정 합의한 북핵 신고안이 당초 기대에 못 미쳐 우려를 낳고 있다. 미 언론과 외신에 따르면 싱가포르 협상에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의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과 대(對)시리아 핵 확산 의혹에 대해 미국이 북한 대신 신고(declare)하고 북은 이를 인지(acknowledge)하는 방식에 북측과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간접신고’ 방식은 ‘모든 핵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명시한 작년 10·3합의와도 거리가 멀다. 북한은 핵 신고를 애매하게 하고, 미국은 이를 용인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미 행정부와 의회에서도 이 잠정합의안을 추인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격분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의 UEP와 대시리아 핵 확산 의혹에 관한 검증이 제대로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도 11일 “모든 핵 신고 문서와 내용은 검증 가능해야 하고 검증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북한은 작년 10·3합의에서 영변 핵시설 불능화(不能化) 및 핵 신고를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및 적성국교역법 적용 중단과 맞바꾸기로 했다. 그러나 북은 핵 신고 시한을 3개월 이상 어기고 있다. 그러자 힐 차관보가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신고기준을 낮춰주려 한 것이 화근 같다.
그런데도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어제 “미국 국내정치 절차를 거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전체 국면에 큰 영향은 주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안이해 보인다. 북한의 불성실한 신고를 묵인해주면 다음 단계인 검증과 폐기는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북한 외무성은 싱가포르 회동 다음 날에도 “이제는 6자회담 참가국들의 의무사항 이행을 주시할 것”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도 걱정하는 합의안을 우리 정부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북핵 폐기를 위한 한미공조를 말할 수나 있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북-미 간 협상의 문제점을 꿰뚫어 보고 주말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핵 불용에 관한 확고한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