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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병기]또 한 번의 수업료

입력 | 2008-04-15 02:58:00


“두 달 남짓 만에 1억 원 날아갔네요….”

“마이너스 30% 육박하는데 뺄 수도 없고, 하루하루 피가 말라갑니다.”

“25세 펀드 몰빵의 결과 ㅠ.ㅠ 몰빵하면 저처럼 돼요.”

펀드투자 커뮤니티 사이트인 ‘모네타 펀드’에 올라와 있는 하소연이다. 중국이나 인도, 베트남 증시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가 낭패를 겪은 투자자들이다.

2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최근 5개월간 해외펀드 투자로 평가손은 18조 원에 이른다. 작년 한 해 피땀 흘려 수출해서 벌어들인 무역수지 흑자(14조4000억 원)보다 큰 액수다. 중국펀드에서만 11조 원의 평가손실을 봤다.

손해를 본 투자자만 있는 건 아니다. 중국펀드 평가 기간을 1년으로 늘리면 수익률은 17.94%다. 결국 초기 투자자들은 아직도 손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작년 하반기 해외펀드 열풍에 뒤늦게 편승한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본 것이다.

투자에 대한 책임은 1차적으로 본인에게 있다. 하지만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정부와 금융회사가 이런 피해를 부추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상수지 흑자로 달러가 넘쳐나자 정부는 지난해 1월 해외펀드 3년 비과세 조치와 개인의 투자 목적 해외부동산 취득한도를 100만 달러에서 300만 달러로 대폭 늘렸다. 경상수지 흑자로 달러가 넘쳐나면서 원화 가치가 상승하자 이를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다.

이후 해외펀드 설정액은 6개월 만에 30조 원이 늘어 49조8856억 원으로 폭증했다. 해외펀드 열풍이 불 때 감독 당국은 어떤 경고 사인도 하지 않았다.

금융회사는 한술 더 떴다. 투자자들에게 주가의 등락이 심한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에 투자하라고 유도한 측면이 크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과거 제품 수출로 외화를 벌었듯이 이젠 자본을 수출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큰소리쳤다.

지난해엔 국내 51개 자산운용사가 국내 주식형 펀드(102개)보다 두 배나 많은 218개의 해외 주식형 펀드를 내놓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진정한 분산투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어야 할 금융사들이 오히려 ‘글로벌 분산투자’라는 명분 아래 ‘몰빵 투자’를 부추긴 셈이다.

당시 해외 투자자들은 중국과 인도에서 돈을 빼 원자재나 금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국의 투자자들은 중국과 인도 베트남 증시에서 상투를 잡아 해외 투자자들의 ‘봉’ 노릇을 해준 셈이다.

하지만 은행이나 증권사는 펀드 판매 수수료로, 자산운용사들은 펀드 운용 수수료로 큰돈을 벌었다. 선진국 같았으면 투자자들이 펀드 판매 회사들을 상대로 “위험 고지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며 대규모 손해배상을 청구했을 것이다.

한 국가의 경제가 성숙하면 상품과 서비스 외에도 투자를 통해 돈을 버는 ‘자산 경제’로 전환된다. ‘무역대국’ 일본은 이미 2005년부터 무역보다 해외투자로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다.

하지만 각 경제주체가 자산경제로의 전환 과정에 얼마나 준비가 돼 있는지, 언제까지 혹독한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한국처럼 해외펀드에 ‘몰빵’ 투자하는 나라는 없다. 더 심각한 것은 금융회사다. 리스크 관리 없이 투자자들을 한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금융회사들은 곧 ‘신뢰의 위기’를 맞을 것이다.” 지난주 후배 기자가 홍콩에서 만난 해외 자산운용사 대표의 충고다.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