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음력 3월 16일 오후 1시경 일경들은 돌연 부락을 습격하여 청년 21명과 여인 2명, 도합 23명을 무기로 위협하여 예배당에 감금하고 출입문을 폐쇄한 뒤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불길은 두렁바위를 사를 듯 하늘에 뻗쳤고, 순국열사의 기막힌 통곡성은 아득히 구천으로 사라진 채 예배당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1959년 월탄 박종화가 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탑 비문’ 중에서)
경기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 1919년 4월 15일의 일이었다.
두렁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두렁바위 마을 또는 제암리(堤巖里)로 불리는 곳. 이 마을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1900년 전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서였다. 그 후 아펜젤러에게 전도 받은 교도들이 증가하면서 1905년 정식으로 교회당이 세워졌다.
3·1운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던 1919년 3월 말. 제암리 교회 청년들은 천도교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밤마다 일제 경찰 몰래 봉화의 불길을 올렸고 3월 30일과 4월 5일 옆 마을 발안의 장날을 맞아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열흘 뒤인 4월 15일,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 제78연대 소속 아리타 중위가 30명의 헌병을 이끌고 제암리에 나타났다. 그는 “발안 장날의 가혹한 진압을 사과하겠다”며 15세 이상 되는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도록 했다.
주민들이 교회에 모이자 일본 헌병들은 순식간에 교회당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렀다. 밖으로 빠져 나오려는 사람들에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거두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미국인 의료 선교사 스코필드가 인근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희생자들의 유해를 안장해 그들의 넋을 위로했다. 스코필드는 몰래 참사 현장 사진을 찍고 이를 미국으로 보내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와 그의 아들 언더우드2세(한국명 원한경)도 참사 현장을 둘러본 뒤 미국으로 보고서를 보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올해 3·1절이 한 달 반 지났다. 제암리의 비극과 희생자들의 푸른 정신을 기억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제암리 순국기념탑 비문의 마지막 대목. ‘스물아홉 분의 순국열사는 푸른 재를 불 속에 뿌려 겨레의 넋을 지켰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