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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고를 잡아라”… 찬호는 왜 LA로 갈수 밖에 없었나

입력 | 2008-04-15 08:29:00


찬호 SD전 완벽구원…3경기 연속 무실점

‘실력으로 형성된 다저스의 아시아 커넥션이다.’

LA 다저스는 메이저리그(MLB)의 서부시장을 개척한 팀이다. 메이저리그 흑백 인종의 벽을 허문 팀이다. 아울러 다저스는 사실상 아시아 시장을 창출한 팀이다. 사상 최초의 동양인 빅리거는 무라카미 마사노리(샌프란시스코·1964년)였지만 가시적 성과는 노모 히데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도 다저스를 통해 꿈을 실현했다. 대만의 첫 빅리거(천진펑·2002년)도 다저스에서 나왔다.

다저스가 브루클린에서 LA로 옮긴 50주년이 되는 2008시즌, 다저스의 25인 로스터 중 5명이 동양인이다. 선발에 구로다 히로키와 궈홍즈, 불펜에 박찬호와 사이토 다카시 그리고 내야수로 후진룽이 포진해 있다.

이에 대해 다저스 아시아 스카우팅 팀에서 일하다 롯데 자이언츠 감독 보좌역으로 옮긴 커티스 정은 “마케팅을 고려한 아시아 커넥션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다저스는 최고의 팀이 될 25인 로스터 구성을 위해 전 세계를 뒤진다. 박찬호도, 사이토도, 그 이전의 동양 선수들도 그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구로다와 궈홍즈, 후진룽의 경우 커티스 정이 스카우트와 입단 협상에서 팀 적응까지 관여한 케이스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의 중계권은 일본과 달리 MLB 사무국이 국제 중계권을 관할한다. 이 액수가 얼마가 되든 30구단에 공동 분배되기에 다저스가 중계권을 노리고 아시아 선수를 영입할 리 없다.

아시아 선수를 통해 관광 수입이나 유니폼, 티켓 판매 증가 등 경제 효과를 기대할 순 있겠지만 커티스 정은 “그런 요소는 보너스”라고 잘랐다. 어디까지나 영입의 주요인은 야구 실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박찬호는 시속 160km를 뿌리는 잠재력, 최희섭은 폴 디포데스타 전임 단장이 중시하는 OPS에 부합한 점, 서재응은 트레이드 직전 시즌 후반기 뉴욕 메츠에서의 호성적이 다저스행의 결정적 동기였다. 일본과 대만 선수도 비슷하다.

다만 다저스가 다른 구단에 비해 유독 아시아 시장에 관심을 두고 있는 점은 사실이다. 커티스 정에 따르면 피터 오말리 전임 구단주 시절부터 아시아 지역 특별 보좌관을 뒀다는 전언이다. 커티스 정의 상사였던 일본계 A.C. 고로키의 작품이 바로 노모였다. 오말리 전 구단주 역시 박찬호의 결혼식에 참석할 정도로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저스는 과거 일본과 대만에 원정경기를 갔을 정도로 글로벌 전략의 중추로 아시아를 설정하고 있다. 요미우리 V9 신화를 만든 가와카미 데쓰하루 등 일본 지도자들이 다저스의 베로비치 캠프를 견학한 바 있다.

지난 3월 베이징 원정도 MLB 사무국의 지시가 작용했지만 다저스가 원정 부담을 마다하지 않은 점도 아시아 시장에 대한 열망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실력으로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지만 플러스알파 후광효과를 내재하고 있는 한·중·일의 다저맨들이다.

한편 박찬호는 14일(한국시간)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홈경기에 구원으로 등판해 2이닝 2안타 2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최근 3연속경기 무실점행진에 방어율은 1.50으로 낮아졌다.

메이저리그 LA다저스, 인연도 악연도 그들에겐 ‘필연’

아시아 선수 발굴에 유독 애착을 둔 LA 다저스인지라 당사자의 의사와 별개로 한·중·일 대결 구도로 비쳐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가장 대표적 케이스로 박찬호 대 노모의 라이벌 구도를 꼽을 수 있다.

빅리그 데뷔는 박찬호가 먼저(1994년)였지만 2경기만 던지고 마이너로 강등된 뒤 96년에야 빅리그로 복귀했다. 반면 노모는 다저스 첫해였던 1995년부터 내셔널리그 신인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하며 토네이도 열풍을 몰고 왔다. 그러나 먼저 다저스에서 쫓겨난 쪽(98년)은 노모였다.

이후 2001년까지 전성기를 누린 박찬호가 전세를 역전시키는 듯 했으나 다저스로 컴백(2002∼04년)한 노모가 막판 불꽃을 태웠다. 절치부심하던 박찬호는 2008년 초청선수로 다저스와 계약한 뒤, 끝내 살아남았다. 노모 역시 캔자스시티에서 1000일 만에 빅리그 컴백을 성취했다.

이밖에 대만 첫 빅리거 천진펑(현 라뉴)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박찬호 상대로 홈런을 쳐낸 인연으로 다저스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디포데스타의 아이콘’ 최희섭(현 KIA)은 나카무라 노리히로(현 주니치)와 대결 구도를 이뤘고, 판정승을 거두긴 했지만 둘 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귀향했다.

이후 등장한 서재응(현 KIA)은 선발로서 마무리 사이토, 불펜의 궈홍즈와 경쟁이라기보다는 협력 관계를 이뤘다. 특히 서재응은 탬파베이로 트레이드 되기까지 궈홍즈와 바로 옆 라커룸을 쓰고, 캐치볼 파트너로 삼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올 시즌 들어선 박찬호가 구로다, 궈홍즈와 선발 경쟁을 펼치는 판세가 전개됐다. 후진룽도 야수로서 빅리그에 잔류하고 있다.

김영준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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