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나란히 누워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 그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한다 해도 나는 당신의 꿈을 함께 상영할 수도 없고 훔쳐볼 수도 없다. 당신이나 나나 혼자 꿈을 꾸고 혼자 생각한다. 당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렇게 말해 놓고 어느 날은 한없이 쓸쓸해졌을지도 모른다. ‘내 혼자 마음 나같이’ 알 수 없었으니 당신은 갑자기 외로워졌을 것이다. ‘내 혼자 마음 나같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는 어느 날 당신에게 불현듯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쓸쓸함을 감추고 그런 서운함을 숨기는 것은 ‘혼자 마음’에 우리가 함께 도달할 수는 결코 없으리라는 그 영원한 불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혼자 마음을 나처럼 아는(안다고 믿고 또 그렇게 믿어지는) 당신, 당신의 혼자 마음을 당신처럼 아는(안다고 믿고 그렇게 여겨지는) 나를 우리는 사랑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뻔해지지 않았는가. 이건 사랑의 끝이 아닌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당신이 안다고? 이번엔 이렇게 우리의 지루한 오해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쓸쓸해질 때, 자꾸 서운해질 때, 아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이라고 탄식할 때, 우리는 그리워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가난한 존재들이다. 그러하니,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이라는 영탄은 사랑의 실패 뒤에 붙여지는 한숨이 아니라 사랑의 실재를 감싸며 휘도는 사랑의 발성이다. 이 사랑의 발성이 ‘간곡한 방울방울’ 같은 영랑의 언어를 통해 둥근 파문처럼 가없이 공명하고 있다.
김행숙 시인·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