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가 이끄는 新 명동별곡
《#1956년 ‘명동백작’들
“일단 술부터 가져와!” “밀린 술값이나 내라고요.”
명동의 작은 술집이 소란스러워졌다.
술집 주인은 “오늘은 기필코 받아내야겠다”며
벼른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이 사내는 주인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시를 써내려갔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시인 박인환의 대표작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술집 외상값 독촉을 받다가 즉석에서
발표한 작품이었다. 작가 이봉구는 자신의 작품
‘명동’과 ‘명동백작’에서 그 시절을 회고했다.
“명동이 있고, 문학이 있고,
술이 있었기에 행복했었다”고….
#2008년 명동 스트리트의 ‘패셔니스트’들
형형색색의 운동화, 그리고 벽을 수놓은
대형 그래피티 작품들.
이곳은 바로 스포츠브랜드 나이키가 만든
스트리트 패션 갤러리 ‘비 트루 아트’다.
다음 달 16일까지 서울 명동 아바타몰 1층에서
진행될 이 전시회는 하이탑 슈즈(발목 신발)를
소재로 7명의 예술가가 꾸미는 옴니버스 팝아트
전시회. 명동에서 10대 패션을 대상으로 한 전시회가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신나는 힙합 음악이 흐르는 전시회를 채운 것은
대부분 10, 20대 초반이다. 이곳을 4번이나
찾았다는 이충현(17·현대고 1년) 군은
“힙합 문화를 홍익대 앞이 아닌 명동에서 보니
느낌이 새롭다”고 말했다.
나이키 마케팅팀 박여란 씨는
“최근 명동이 홍대 앞이나 강남역 못지않게
‘스트리트 패션’ 근원지로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
50여 년 전 문학을 논했던 ‘명동백작’들에겐 펜과 종이, 술병이 명동 행차의 필수품이었다. 지금 21세기 명동백작들에겐 ‘컨버스’ 운동화, ‘노스페이스’ 바람막이 잠바가 있다. 한때는 잘나가는 옷쟁이의 양장점이, 최루탄 냄새도 감히 오르지 못했던 명동성당이 명동의 상징으로 꼽혔다면 지금은 하루 1000명 이상이 드나드는 신발 멀티숍 ‘ABC마트’가 명동의 대표선수로 불린다. 갈수록 젊어지고 있는 0.91km²의 금싸라기 땅 명동, 오늘도 그곳에선 10대들의 ‘신(新)명동별곡’이 울려 퍼지고 있다.
○WHAT+WHERE… 명동 회춘(回春)시대
지난해 12월 문을 연 일본 중저가 캐주얼 브랜드 ‘유니클로’는 명동 보세 패션의 중심이라 불렸던 ‘명동의류’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섰다. 지상 4층의 2300여 ㎡(약 700평) 규모인 이곳에 평일 고객만 1000명, 휴일은 2배가 넘는다. 또 월 매출은 13억 원으로 유니클로 전체 매장 중 1위다. 이런 인기를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고객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10대였다.
이들이 10대로부터 인기를 얻게 된 데는 단지 싼 가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유니클로 마케팅팀 김태우 주임은 “개성이 강한 10, 20대를 타깃으로 잡았다”며 “이들이 즐겨보는 길거리 패션 잡지나 힙합 클럽 잡지를 중심으로 홍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머드급의 매장으로 10대 관객을 끌어 모으는 곳은 990㎡(약 300평) 규모의 신발 멀티숍 ABC마트도 마찬가지였다. 10대들이 좋아하는 최신가요를 틀어놓고 이들이 즐겨 신는 최신 유행의 신발을 매장 앞쪽에 놓는 등 철저히 ‘10대 마케팅’을 펼치며 젊은 층을 모으고 있다. 평일에는 500명, 휴일은 1500명 정도의 10대가 이곳을 집 드나들 듯 편히 찾는다. ABC마트의 김가영 팀장은 “예전에는 부모님들과 함께 와서 신발을 구입했다면 지금은 친구들과 함께 들러 손수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 같은 스포츠브랜드부터 컨버스 같은 신발 브랜드까지….
명동 내 패션 매장 중 절반 이상은 10대나 20대 초반을 타깃으로 한 브랜드다. 이 중에는 브랜드의 정체성이 바뀐 경우도 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 명동점은 지난해 9월 재정비하면서 등산용품 대신 10대들이 즐겨 입는 바람막이 잠바 판매에 주력한다. 성인경 매니저는 “인천이나 경기 수원 등 인근 수도권에서 오는 10대들을 위해 다른 매장에 없는 바람막이 잠바, 면 티셔츠 등을 10종류 이상 다양하게 갖춰 놓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들어선 글로벌 브랜드 ‘갭(GAP)’은 2030세대를 주 고객층으로 잡았지만 10대 고객이 늘고 있는 것에 쾌재를 부르고 있다.
명동이 ‘뜨거운’ 10대 패션지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FUBU’ 매장이 그래피티 아트로 꾸며지고 컨버스 매장 앞에서 붓과 물감을 가진 예술가들이 무료로 신발 튜닝을 하는 모습은 분명 과거 명동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HOW+WHEN… 계획적인 회춘
1950, 60년대 디자이너 양장점을 시작으로 시대마다 명동을 대표하는 상점은 존재했다. 1970년대 코스모스백화점, 1980년대 롯데, 미도파 등의 백화점과 금강제화, 1990년대 ‘유투존’으로 대표되는 대형 패션몰에 이어 현재는 ABC마트로 대표되는 10대 스트리트 패션 매장을 꼽을 수 있다.
명동의 회춘이 본격 시작된 것은 2003년이다. 미도파백화점 자리에 롯데백화점 ‘영플라자’가 들어선 후부터였다. 10, 20대 젊은 여성들을 위한 일본 도쿄 시부야 패션전문관 ‘시부야 109’를 벤치마킹한 영플라자는 현재 100개의 영캐주얼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으며 매출의 40% 이상을 내는 고객이 10대라고 분석했다. 영플라자의 김석훈 팀매니저는 “10대 고객을 위해 매장 운영 시간(오전 11시 반∼오후 9시 반)을 조정했고 10대 남성 고객 매출이 늘고 있어서 남성 브랜드를 강화하고 이들이 좋아하는 정보기술(IT) 기기 매장도 들여왔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랫동안 명동을 지켜온 ‘터줏대감’들도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금강제화는 3년 전부터 1020세대를 위한 신발 멀티숍 ‘레스모아’를 나란히 운영하고 있고 밀리오레 역시 연령대를 하향 조정했다. 한 남성복 매장 주인은 “2030세대가 좋아하는 정장풍 의상을 팔았지만 요즘은 스키니진, 그래픽 티셔츠 등 10대 의상들을 구비했다”고 말했다.
마치 계획도시처럼 일사불란하게 젊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관할구청인 중구의 방침은 계획적이었다. 관광정책팀 박순종 팀장은 “보세 패션의 중심지인 동대문이 서울시 주도로 국제적인 패션타운으로, 명동은 젊고 감각적인 콘셉트로 변모해 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중구는 앞으로 명동에 차 없는 거리를 만들고 ‘비보이’와 ‘그래피티 아트’ 등 10대 문화 축제를 만들어 계속 10대들을 유치할 계획이다.
○WHY+WHO… 모두가 소비하는 명동의 10대 패션
명동이 유행에 민감한 영캐주얼, 소위 ‘패스트 패션’의 메카로 변모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일종의 자성의 목소리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명동 패션이 길거리 보세 패션으로 바뀌며 할인매장과 시장 분위기를 냈고 젊은이들은 복잡한 명동 대신 자신에게 알맞은 압구정동과 청담동(명품), 동대문(패션타운), 홍익대 앞(개성파 디자이너)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에 인터넷의 발달로 하루 수십 개씩 생겨나는 갖가지 주제의 온라인 패션시장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곳곳에서 명동 패션 상권 침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패션 홍보대행사 ‘오피스 에이치’의 황의건 이사는 “외환위기 이후 더는 지갑을 열지 않는 기성세대 대신 10대를 새로운 소비주체로 파악했기에 10대 위주의 패션 브랜드들로 물갈이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비단 패션만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명동상가번영회의 박성철 실장은 “이들의 목적은 쇼핑을 넘어 즐거움을 찾는 것”이라며 명동 문화를 소비하고 만들어내는 주체로 평가했다. ‘프리허그’ 같은 돌발 이벤트나 길거리 음식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10, 20대 초반의 젊은 층이 늘었다고 윗세대들의 소비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10대를 타깃으로 한 브랜드들이 자리 잡으면서 2030세대나 그 윗세대도 스키니진을 소비하는 등 과거보다 젊게 입으려는 양상을 띠는 것을 꼽았다. 패션컨설팅 회사 ‘인터패션플래닝’의 한선희 부장은 “지금의 명동 패션은 나이와 상관없이 10대의 ‘스트리트 패션’ 감성을 함께 소비하는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