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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34년 셜리 템플 첫 장편 영화 개봉

입력 | 2008-04-19 02:58:00


삶이 팍팍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사람들은 우상을 만든다. 대공황에 심신이 지쳐 있던 1930년대 미국인들은 영화관에서 ‘아이돌’을 발견했다.

1934년 4월 19일 개봉한 ‘스탠드 업 앤드 치어(Stand Up & Cheer!)’. 여섯 살짜리 금발머리 소녀 셜리 템플은 처음 출연한 장편 영화에서 깜찍한 탭댄스와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이후 13세까지 30여 편에 출연한 그녀는 춤추고 노래하며 낙담한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에 셜리 템플이 있는 한 우리는 괜찮을 거야”라 했을 정도였으니…. 그녀 모습을 본뜬 인형과 그녀 이름이 붙은 드레스, 머리 리본, 비누, 칵테일이 불티나게 팔렸다.

일곱 살 때 최연소로 아카데미상(아역 분야)을 받았다. 1936∼38년에는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등 쟁쟁한 어른 스타들을 제치고 박스오피스의 정상에 올랐다.

‘오즈의 마법사’(1939년 개봉)의 도로시 역도 원래 셜리 템플 몫이었다. 그녀가 소속된 20세기 폭스사와 영화를 만든 MGM의 협상이 깨져 주디 갈런드에게 주연이 돌아갔지만.

어린 소녀를 시대의 우상으로 치켜세운 할리우드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셜리 템플, 가장 어리고 성스러운 영화 속 괴물’이라는 그림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의 몸에 그녀 얼굴을 갖다 붙였다.

미국의 꼬마 연인도 세월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그녀를 스타로 만든 대공황도 끝났다. 10대 중후반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17세 때 결혼하면서 사실상 영화 인생을 접었다.

1950년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았다. 1960년대 말에는 정계에 진출해 1970, 80년대 유엔주재 미국대사,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1972년 그녀는 다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유명 인사로서는 처음 공개석상에서 유방암에 걸린 사실을 밝힌 것. “유방암에 걸린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다.

23일 그녀는 80번째 생일을 맞는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라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 속에서 미국인들이 다시 셜리 템플 같은 아이돌을 찾아낼 수 있을까.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