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있지만 민주주의 체제도, 인민을 위한 정권도 아니다. 2300만 주민 대다수를 굶주림과 정치적 부자유(不自由) 속에 가둬놓고 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북한의 식량위기가 심각하다고 밝혔다. 작년엔 주민 생존에 필요한 식량의 80%를 확보했으나 올해는 60% 선에 그칠 우려도 있다고 한다. 식량난을 조금이라도 덜려면 5월 중에는 비료를 뿌려야 하지만 비료부터 태부족이다. 사람을 굶기는 것보다 모진 고문(拷問), 심한 인권유린은 없다.
김정일 정권이 핵 폐기과정을 믿을 수 있게 이행한다면 한국 정부와 국민은 북을 기아에서 구해줄 용의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 개방 3000 구상’은 북이 핵을 버리고 개방에 나서면 1인당소득을 3000달러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겠다는 내용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외교관계 수립과 경협 확대에 나설 자세가 돼 있다.
그럼에도 북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성실한 신고와 검증’을 어떻게든 비켜가려 한다. 남한의 새 정부엔 ‘이명박 역도’니 ‘이명박 패당’이니 욕설을 퍼붓고, ‘잿더미’ 운운 협박까지 한다. 북한 당국이 이럴수록 주민의 삶은 더 힘겨워진다.
김 위원장부터가 남한의 민주체제 작동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김대중(DJ),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들의 색깔에 맞는 대북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이 선거를 통해 이들 정권의 탄생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DJ가 남북 정상회담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도 국민이 대통령으로 만들어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李-부시 메시지 부드럽지만 단호
우리 국민은 이번 대선과 총선을 통해 맹목에 가까운 친북 정권을 교체하고, 북에 대한 실용적 상호주의를 내세운 이명박 정권을 선택했다. 신정부의 대북노선 변화는 국민의 뜻인 것이다. 아무리 ‘친미 사대 매국정권’이라고 몰아세워도 압박효과가 별로일뿐더러 손 내밀기만 어색해질 것이다.
이 대통령도 남북관계의 특수성은 인정한다. 연락사무소 설치 제안도 그래서 했을 터이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특수성이 자유와 인권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생각 또한 단단해 보인다. 이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신뢰의 기반 위에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공동이익을 확대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전략적 동맹에 합의했다.
한미 두 지도자는 부드러운 화법을 구사했지만 ‘원칙 있는 대북정책’ 공조도 확인했다. 북을 다루는 전략 전술까지 상당부분 공유하게 될 것이다. 북은 11월 미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 사정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공화당 정권이니까 오히려 대북 유화책에 대한 미국 내의 비판이 덜 거세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북은 이 대통령의 ‘비핵 개방 3000 구상’에 대해 ‘사기협잡꾼의 반공화국 모략’이니 ‘자주적 존엄을 건드리는 사탕발림’이니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이 구상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북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 설 자리는 더 좁아졌다.
김 위원장은 “북한도 진정성을 갖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권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주적 존엄’도 경제력과 스스로 위기를 타개할 국가경영능력이 뒷받침돼야 지킬 수 있다. 구걸이 불가피한데 자존심만 내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상대 지도자를 ‘역도’라고 해서는 소통할 길이 없다. 쌀이나 비료가 필요하면 예의를 갖춰서 달라고 해야 한다.
‘주민 굶기는 지도자’ 수치 느껴야
전통적으로 남한이 당당하게 나가면 북은 잠시 강경하다가 이내 대화 테이블로 돌아오곤 했다. 이때 남한 대통령이 ‘통일 대통령’이라도 될 듯이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실무자들이 조급하게 성과를 내려고 덤비면 북의 전술에 넘어가기 십상이다. 남북관계의 조정기가 길다고 안달할 일은 아니다. 북이 타협적 자세로 나온다고 감동할 것도 없다. 대화는 줄 만큼 주고, 받을 만큼 받기 위해 하는 법이다. 이 정부 관계자는 “우리는 DJ나 노 정부와는 다르다. 북은 우리를 잘못 보고 있다. 협박을 한다고 안 줄 것을 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주민을 굶기는 지도자는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이제 김 위원장이 변할 차례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