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죄송합니다.”
2시간 20분에 걸쳐 열정적인 1인극을 선보인 배우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관객들은 박수를 멈췄고 무대는 적막감에 휩싸였다.
“오늘 몸 상태가 좋지 못했어요.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오전에 더 심해져 목이 쉬어서 제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배우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최상의 공연이 아니었어요. 나가실 때 주소를 적어주시면 다음 공연 때 다시 모시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와 환호로 격려했다. 배우는 연방 고개를 숙이며 거듭 사과했다.
2월 23일 모노극 ‘벽속의 요정’(극단 미추)이 열린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과를 한 주인공은 중견 배우 김성녀 씨. 분장실에서 만난 그는 눈물로 번진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 기자에게 “30년이 넘는 배우 생활에서 이렇게 부끄럽고 속상했던 적은 처음”이라며 “다음 공연 때 꼭 다시 와 달라”고 말했다.
‘벽속의 요정’은 좌익활동 경력 때문에 6·25전쟁 후 평생 벽 속에 숨어 지낸 아버지와 이를 뒷바라지하는 가족을 그린 1인극이다.
이 작품은 2005년 올해의 예술상과 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선정된 수작으로 4년째 무대에 올랐다. 이 극에서 1인 32역을 소화한 김성녀 씨는 2005년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5월 5∼14일 서울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다시 오른다. 극단 미추는 2월 공연 때 주소를 적고 간 관객 30명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극단 미추의 박현숙 실장은 “관객들의 사연이 대부분 ‘오늘 공연에 만족했지만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주소를 적고 간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공연계에는 젊은 배우들이 무리한 겹치기 출연으로 작품이나 연기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같은 기간에 두 작품에 출연하기도 하고, TV 출연과 뮤지컬 공연을 함께 하는 이들도 있다. 한 공연기획사의 대표는 “뮤지컬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겹치기 출연을 하는 배우가 많은데 한 작품에 전념해 달라고 하면 출연 자체를 거부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그런 배우들에게 ‘벽속의 요정’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벽속의 요정’은 중견 배우의 열정과 자존심이 담긴 무대다. 인기나 출연료보다 ‘영원한’ 배우로서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유성운 문화부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