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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상영]삼성, 이건희 이후

입력 | 2008-04-24 02:58:00


삼성은 한국사회에서 매우 특이한 기업이다. 누구나 한국 최고 기업으로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한편으론 질시하고 욕을 한다. 삼성이 잘하면 ‘당연히 그 정도는…’이라는 반응이 나오고, 잘 못하면 ‘삼성이 그럴 수가…’라는 질타가 잇따른다. 1등 기업의 역(逆) 프리미엄이라고 해야 할까.

1등 기업의 逆프리미엄

22일 발표한 삼성 경영쇄신안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국내외의 평가가 일치하듯 이건희 회장의 퇴진으로 상징되는 이번 조치는 충격적일 정도로 강도가 셌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총수의 퇴진은 조직문화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삼성은 굉장히 심각한데 비판론자들은 진정성을 의심하는 낯익은 구도가 재연되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 자체가 삼성이 무언가 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해줬음직하다.

비판론자들이 문제 삼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이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경영권 승계 중단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과 지배구조 개선의 실질적 방안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지적은 타당한 것일까. 한번 짚어볼 때가 됐다.

이재용 전무는 삼성전자의 최고고객책임자(CCO) 자리를 내놓고 해외근무를 하게 된다. 일종의 고난수업을 떠나는 셈이다. 선진국에서도 2세로 경영권을 승계할 때 여건이 열악한 해외 사업장이나 사업부를 맡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스스로 경영능력을 갖췄음을 주주들에게 입증하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의 경영권 승계에는 이런 절차가 미흡했다. 따라서 이를 ‘일시적 외유와 다를 바 없는 조치’라고 폄훼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로부터 삼성을 물려받은 뒤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가 물러난 지금 경영인으로서 그의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오너였지만 뛰어난 경영능력도 검증됐다. 이 전무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될 것이다. 부친과 관계없이 능력을 보여준다면 굳이 경영 참여를 막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삼성의 지배구조는 더욱 예민한 문제다. 현재 삼성은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로 돼 있다. 이번 발표대로 삼성카드가 에버랜드 주식을 팔면 순환출자 구조는 일부 해소된다. 하지만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것처럼 현재의 지배구조를 완전히 버리고 지주회사 체제로 가려면 20조 원가량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대주주가 안정적 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비용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비용을 마련할 현실적 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음성적 자금조성이 가능하지도 않다.

이런 상태에서 현재의 지배구조를 완전히 버리라는 압박은 경영권을 내놓으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다. 다양한 경영권 방어수단을 허용하는 선진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한국 최고 기업을 일궈온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다. 이 문제는 유럽의 몇몇 사례에서 보듯 기업이 사회적으로 일정한 기여 또는 약속을 하고 사회는 오너 가문의 경영권을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방식으로 해결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합의 도출하는 계기로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여론을 살피며 경영권 승계를 해나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경영에는 굉장히 큰 리스크 요인이다. 이런 리스크를 감내하면서 기대보다 강도가 센 쇄신안을 내놓은 삼성의 고민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삼성은 한국 최초의 세계적 초우량 기업이다. 이 과정에 국가의 지원, 국민의 성원도 있었고 오너 일가와 삼성맨들의 땀과 노력도 있었다. 삼성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의는 바로 모든 것이 최초라는 데 있다. 스스로 다른 기업의 선례가 돼야 하는 숙명이다.

삼성이 한국의 첫 글로벌 기업으로서 사회적으로 다양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번 선제적 발표를 색안경을 끼고 볼 일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와 기업, 오너 가문이 적절한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이 어떨까.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