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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83년 ‘가짜 히틀러 일기’ 소동

입력 | 2008-04-25 02:57:00


1983년 4월 25일 월요일. 전 세계에서 200명이 넘는 기자들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 함부르크로 몰려들었다. 시사주간지 슈테른의 본사에서 특종을 자축하는 기자회견이 열리는 까닭이다. 페터 코흐 슈테른 편집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 일기의 한 자 한 자를 히틀러가 썼다고 100% 확신합니다.”

이날 슈테른은 “히틀러의 일기가 발견됐다”는 제목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일기를 발췌해 출간했다. 게르트 하이데만 기자는 ‘피셔 박사’라는 사람을 통해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 일기를 입수했으며, 이는 1945년 드레스덴 근처에서 일어난 비행기 추락사고 현장에서 건져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슈테른은 1932년부터 1945년 히틀러 사망 직전까지 기록한 일기 62권에 약 900만 마르크(약 500만 달러·현재 환율로 약 49억 원)를 지불했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는 일기의 독점 연재권을 40만 달러에 샀다.

일기를 가장 가까이서 살펴본 영국 사학자 휴 트레버 로퍼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히틀러 전문가로 회견 이틀 전 선데이 타임스에 ‘이 일기는 진짜가 틀림없다’는 글을 썼다. 그런 그가 기자회견장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슈테른 관계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사학자로서 특종을 위해 역사적 검증 절차를 소홀히 한 점을 후회합니다.”

그는 추락한 비행기와 일기 간 연결고리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철저히 조사하기 전에는 최종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며칠 뒤 “일기는 모두 위조”라고 결론지었다. 사실 트레버 로퍼는 선데이 타임스의 임원으로 일기 연재 건에 깊숙이 관여돼 있었다.

누가, 왜 가짜 일기를 만들었을까. 당시 많은 사람들은 소련이 자금을 마련하려고 동독에서 나치 기념품을 만드는 ‘위조 공장’을 운영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 타스통신은 “‘히틀러 일기’는 파시즘을 옹호하려는 추잡한 조작”이라고 일갈했다.

그해 5월 콘라드 쿠야우가 경찰에 붙잡혔다. 동독에서 나치 시대의 유품을 팔아온 사기꾼이었다. 히틀러가 연설에서 언급한 사적인 내용을 모아 가짜 일기를 썼으며, 종이와 잉크는 현대의 제품이었다. 2002년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하이데만 기자가 실은 동독의 비밀경찰이었다는 것이다.

그저 특종 욕심이었을까, ‘위대한 영도자’를 잊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거짓 같은 진실과 진실 같은 거짓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