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내 어린 시절에도 작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올림픽 때문에 세상에서 ‘활동사진’을 처음 보았다. 초등학교 입학 전 아버지를 따라가 구경하고 다시 어머니와 함께 구경한 다음 학교에 입학한 뒤엔 단체로 또 구경해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화를 세 차례나 봤던 것이다. 젊은 여자 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16명의 남자 조수를 부려 제작했다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걸작 ‘제(諸) 민족의 제전’은 자연히 그를 구경한 어린이에게 어떤 ‘히어로(영웅)’상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그 영화에서 주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주인공은 아돌프 히틀러. 그는 우리 어린이들의 히어로가 됐다.
물론 우리에겐 ‘제 민족의 제전’이 안겨준 또 한 사람의 히어로가 있었다. 마라톤의 우승자 손기정(孫基禎) 선수! 우리는 손 선수가 일본인 아닌 조선인이라는 걸 알고 그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히틀러와 손기정, 그 둘은 철없는 식민지 소년의 마음속에 아무런 모순 없이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의 식민지에서 하염없는 어린 날을 보내던 우리와는 달리 나치 독일에 침략을 당하고 유린을 당한 유럽의 어린이들은 사뭇 다른 베를린 올림픽의 추억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걸 4년 전 프라하에서 경험했다.
어릴때 각인된 히틀러와 손기정
서울 평화상 위원회는 2004년 수상자로 극작가이자 체코의 인권과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을 선정했다. 하지만 수상자의 건강 문제로 우리는 그때 예외적으로 프라하에 가서 시상식을 하게 됐다. 그곳에서 하벨이 수상 소감을 피력한 답사는 일품이었다. 그것은 현대 세계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스포츠의 정치화’에 관해 깊은 통찰을 담은 비판적 담론이었다.
그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자라 그 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체제가 자리 잡는 과정을 살아서 지켜본 축복받은 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올림픽은 원래 그 헌장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선수들 간의 경쟁이지 국가나 정권의 경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 체제에선 “개인이 경기를 통해 얻은 성공은 정권에 의해 빼앗기고 그 체제의 승리로 해석된다”고 하벨은 지적한다.
“자유가 없던 시대에는 스포츠는 정권의 선전 수단으로 이용되고 체제 이데올로기의 자기미화나 허장성세의 힘자랑에 오용될 수 있다”는 하벨의 말은 사격선수건 유도선수건 메달만 따면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공으로 돌리는 북녘 선수들을 익히 보아온 우리에겐 전혀 낯설지가 않다. 내 귀를 아프게 때린 것은 하벨 답사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만약 올림픽 경기를 인권과 문화적 소수민족의 권리를 탄압하는 나라에서 개최코자 한다면 반드시 정치범의 석방과 개혁의 도입을 분명히 조건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을 그는 요구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체코의 현대사를 생각했다. 우리에게 히틀러와 손기정을 영웅으로 안겨준 베를린 올림픽은 체코에 뮌헨 회담을 안겨주었다. 올림픽 개최로 국제사회의 살롱 출입을 하게 된 무뢰한 히틀러는 2년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 지방을 점령하고 그를 뮌헨 회담에서 유화주의적인 영국과 프랑스의 명문화된 동의를 얻게 되자 체코는 1939년 국가로서 소멸돼 버린다. 독재자가 올림픽 축제의 위장된 평화의 베일 뒤에서 무슨 음모를 꾸밀 수 있는 것인지 하벨은 조국의 현대사를 통해 통절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中민주화 인권개선 계기될 것
나는 히틀러가 집권한 해에 태어났고 하벨은 베를린 올림픽이 열린 1936년에 태어났다. 운명의 36년. 그로부터 36년 후에 독일에선 두 번째 올림픽이 1972년 뮌헨서 열리고 그로부터 또 36년 만에 열리는 것이 올해의 베이징 올림픽이다.
나는 하벨의 우려를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올봄 중국의 티베트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 후 하벨이 올림픽 개최지를 재고하라는 요구에는-서울의 성화 봉송 때 보인 중국인들의 속 좁은 난동에도 불구하고-동의할 수 없다. 나치 독일과 달리 올림픽의 개최는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상황에 필경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88 서울올림픽 이전과 이후의 한국을 생각해 보면서.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