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경리 하면 강원도 원주가 떠오른다. 원주는 그가 1980년 54세의 늦은 나이에 정착한 곳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올곧게 살아온 사회 원로인 그에겐 인터뷰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전원 속에 자리 잡은 단구동 자택에서 텃밭을 가꾸며 기자를 맞곤 했다. 그는 벌써 1980년대에 방문객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앞으론 물을 돈을 주고 사서 먹는 날이 올 것이다. 물과 생명을 아껴야 한다.” 문학적 업적도 탁월했지만 미래를 보는 통찰력이 놀라웠다.
▷그가 대표작 ‘토지’를 탈고하고 자연 속의 삶을 실천했던 집필실은 세월이 흐를수록 역사적 가치가 커져갈 것이다. 그러나 자택 일대가 택지로 개발되면서 박 씨는 원주 시내의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집필실은 그대로 남을 수 있었으나 주변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문학적 정취는 작가가 살았던 건물 하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소설을 잉태한 공간 전체에서 나온다. 작가가 거닐었던 길, 살았던 동네가 문학의 산실이다. 어제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점이 다시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가 벌여온 환경운동은 그의 소설 ‘토지’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평소 ‘모든 생명은 살아가기 위해 살아있는 걸 죽여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 자체는 한(恨)’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한에서 비롯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은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토지’에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담겨 있다. 생각이 글 속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표출된 게 그의 환경운동이었다.
▷‘토지’는 200자 원고지 3만1000장이 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조선조 말부터 1945년 광복의 순간까지 한국 사회의 긴 여정이 담겨 있다. 1955년 첫 단편 ‘계산’으로 시작된 그의 창작열은 마지막까지 식지 않았다. 그가 올 3월 발표한 시 ‘옛날의 그 집’은 원주 단구동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한 인터뷰에서 “행복했으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며 파란의 인생을 내비쳤던 그는 떠날 때만큼은 편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