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인류사와 함께해온 문화의 키워드다. 고은 시인은 새로운 세기를 맞아 낭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탑처럼 새롭게 쌓은 낭만의 정의들을 형상화한 그림을 고은 시인이 그려 보내왔다.
어디에 관용의 풍경이 있다는 말인가.
관용은 허울이다.
관용은 허깨비이다.
특히 관용은 정치의 울 밖에서나 떠도는 해묵은 원혼이다.
이따금 보이는 관용은 그것이 기적이라는 심증을 뜻한다. 그나마 심증이지 물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관용이라는 가능성 없이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이해는 울 안에서 울 밖으로 나가는 관용의 첫걸음이다.
거기쯤 관용의 내일이 오고 있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19세기 초의 것이지만 낭만은 인류사의 기원과 함께이다.
한국 낭만주의는 서구 낭만주의의 외형 모방이지만 한국의 낭만은 한국인의 원초적 신명과 흥에서 나오는 광천수이고 한국인의 오랜 정신적 대지의 마그마에서 솟는 불꽃일 터.
지금 한국 또는 한국문화의 도식은 이 낭만의 이상상태에 있는지 모른다.
여기에서 낭만을 새로 정의한다.
낭만을 낮은 것으로 폄훼하지 말 것. 낭만은 이성과 지성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는 한계 넘기인 것.
낭만을 르상티망이나 뭐나 그런 것으로 경멸하지 말 것. 아니 감상의 생명성까지도 생명의 크기임을 깨달을 것.
낭만주의를 행여 자연주의 사실주의 현실주의의 저쪽에 내버려진 허망으로 내치지 말 것.
아니 고전주의가 유골 섬기기라면 낭만주의는 자신의 사막에 꽃밭을 들여오는 것.
낭만은 무한의 시작. 유한의 노예해방.
낭만은 생의 의지와 시대상황 그 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
낭만은 바이런이 본국에서의 행각으로부터 도망쳐 낯선 이방을 떠돌다가 한 종군 외국인으로 병사한 것만으로 유추하지 말 것. 바이런도 죽이지 말고 낭만도 죽이지 말 것.
낭만은 무서운 것. 결코 하잘것없는 것이 아닌 것.
낭만은 신천지에의 갈망과 동경의 자궁인 것.
낭만은 과거를 이겨내고 과거의 권력에 맞서는 현재의 힘인 것.
낭만은 도시 상업사회 이기주의와 이익 추구로만 살 수 없는 인간의 태고본능인 것.
낭만은 저 소비에트 어용 사회주의 리얼리즘 또는 그것 밖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상투성을 벗어나는 것.
그래서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중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내걸어 소비에트 종주국 문학노선 탈피를 지향했던 것.
과연 모든 변혁과 변화로서의 창조는 낭만의 산물 아닌가.
낭만은 지상의 마지막까지 멸종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할 인간의 궁극적 심상인 것.
아니, 낭만은 인류 몇 백만 년의 이동과 우주에의 꿈을 가능케 한 ‘위대한 역사 불안’인 것. 그 불안은 생의 본질로서의 불안인 것.
너의 일상에 낭만의 축제를 더할 것.
나의 임종에 낭만이 남아 있을 것.
그리하여 1920년대의 단명한 낭만주의 또는 시시한 낭만주의를 이 가치의 해체시대를 이끌어갈 동력으로 탄생시킬 것.
조선 후기 영·정조 르네상스가 고체(古體)의 사슬을 풀지 못한 대신 오늘의 르네상스는 자신의 문체를 반드시 개척할 것. 논리의 변신일 것.
앞으로 30년쯤 이것이 요구된다. 한국의 새 낭만주의야말로 한국의 마성(魔性) 그것일 터.
해가 진다. 해가 뜬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허구이다.
철학에서는 잡초가 없어도 농부에게는 잡초가 있다. 철학의 허튼소리는 매혹적이고 농부의 막말은 한층 더 절절하다.
선사시대 유목에서 경작의 생활로 바뀌는 동안 인간은 잡초 제거라는 문화 노동을 회피할 수 없었다. 당장 우리 민요유산 중에 김매기 노동요가 많은 것은 이를 말한다.
한반도의 잡초는 유난스럽게 잡초적이다. 같은 동북아시아 지역인 동시베리아 타이가와 한국 산야의 숲은 억센 잡초로 차이가 난다.
최근 20년 전후로 외래 잡초가 들어와 한국은 잡초 생태계를 새로 편성했다. 그래서 늙은 농부에게 그런 잡초 이름을 물어봐도 모르기 십상이다.
사실 자연 식생(植生) 초본 중에서 어떤 것은 지초(芝草)이고 약초이고 어떤 것은 잡초 독초로 구별하는 일이 인간의 일일 뿐이다. 그래서 잡초란 그 장점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풀이라는 에머슨의 말이 잡초와의 싸움 앞에서는 책상 위의 여담에 불과하다.
지금 농촌은 이런 잡초 제거를 약물로 처리하고 있다. 이제 호미의 김매기나 낫의 벌초는 거의 없다. 제초제는 농약 중의 독약에 준하고 있다.
베트남전의 고엽제가 바로 농촌 제초제의 사촌이다.
이런 약품으로 생산된 먹을거리로 사는 인간에게 그 해악은 진작부터 위험수위를 넘나든다.
그래서 잡초는 농촌의 커다란 부담이 되는 한편 생명 안위의 척도가 되고 있다. 이런 잡초일지라도 그것이 새로 돋아날 때는 예쁘기 짝이 없다.
생각건대 이것들이 우북우북 자라나서 지난 세월의 민둥산이나 나무 없는 지역의 폭우와 홍수 피해를 은혜롭게 막아주었다 할 것이다.
이제 휴전선 남쪽 산야는 국산 연탄과 외국산 석유 가스연료로 초목의 제 세상이 되었다. 개발의 탐욕만 아니라면 나라의 산천초목은 축복받고 남는다.
그동안 잡초는 한국인의 삶에 강렬한 은유가 되어 자못 그 생명의지가 칭송되었다. 며느리밑씻개 같은 험한 이름에도 한국인의 이름 하나하나가 핏줄로 남아 있다.
이중섭이 일본의 숲보다 한국의 벌거숭이산을 역설적으로 사랑한 것도 한국 정서의 각별한 기억으로 된다.
잡초는 농민의 상징이면서 농업의 저주이다. 모순이다.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