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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사이언스/케미컬 에세이]오월의 장미

입력 | 2008-05-07 21:04:00

그라스 교외의 한 장미농원에서 장미를 수확하는 광경.

증류를 기다리는 ‘오월의 장미’ 꽃잎. 한 바구니에 장미꽃잎 10kg 정도가 들어있다.

장미꽃잎 20kg면 증류통이 거의 찬다.(왼쪽)증류 직후 ‘영혼’을 빼앗긴 모습.(오른쪽)


아름다움은 진리보다 위대하다.

- 아나톨 프랑스

5월이 되면 2002년 5월이 생각난다. 당시 아로마테리피(향기치료)용 원료를 공급하는 한 프랑스 회사의 한국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던 기자는 어느 날 우리나라에 아로마테라피를 도입한 의사 가운데 한분인 조성준 경기대 대체의학대학원 교수(당시 조박정신과 원장)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어이 강 선생, 그라스에 한 번 갑시다.”

이 회사가 위치한 곳인 그라스는 지중해를 바라보는 프랑스 남동부의 칸느과 니스 사이에 있는 향료의 메카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무대이기도 하다. 마침 5월에 ‘장미 축제’도 있어서 1주일짜리 ‘아로마테라피 연수’를 준비했다. 엉겁결에 가이드가 된 기자는 조 교수와 여덟 분의 여성을 모시고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 다음날인 일요일 그라스 시내에서 열린 장미축제는 소규모라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시작된 연수는 화학과 식물학 비중이 커 주로 의사와 간호사였던 참석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좌불안석이 된 기자는 특히 한 분 때문에 더 마음이 쓰였는데 바로 안명옥 한나라당 의원이다. 당시 포천중문의대 교수였던 안 의원은 “이렇게 바쁜 때 한가하게 이러고 있으니…”라며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마 조 교수 꾐(?)에 빠져 학기 중에 1주일을 뺀 게 어처구니가 없었던 모양이다.

수요일 오후, 장미꽃잎에서 정유를 추출하는 과정을 견학하는 시간이 됐다. 우리가 꽃집에서 보는 장미는 모양과 색 위주로 개량한 품종이기 때문에 향이 약하지만 향료를 추출하는 장미는 향이 강하고 우아한데 프랑스나 모로코에서 자라는 ‘로자 센티폴리아’(Rosa centifolia)와 불가리아, 터키 지역의 ‘로자 다마세나’(Rosa damascena)가 대표적인 품종이다.

로자 센티폴리아는 불어로 ‘로즈 드 메’(Rose de Mai), 즉 ‘오월의 장미’라고도 불린다. 그라스에 5월이 오면 이 장미가 만발하는데 향은 물론이고 분홍빛 꽃잎도 무척 사랑스럽다. 커다란 바구니 두 개에 가득 담겨있는 장미꽃을 보고 모두들 달려간다. 안 의원도 한참을 앉아서 차갑고 매끈매끈한 꽃잎의 감촉과 향기를 음미하고는 뒤돌아보며 “오길 잘 한 것 같군요”라고 기자에게 미소지었다.

커다란 찜통 같은 증류통에 담긴 꽃잎에 수증기를 쏘이면 향기성분이 딸려 휘발된다. 냉각기를 통과하면서 증기는 물로 바뀌고 기름, 즉 정유가 그 위에 뜬다. 이걸 모은 게 ‘장미 정유’(rose essential oil)고 아래쪽 물은 ‘장미수’(rose water)다. 장미꽃잎 1톤을 증류하면 800g의 정유가 나온다. 꽃 한송이를 10g이라고 하면 10만 송이에 고기 한 근이 조금 넘는 기름이 얻어지는 셈이다. 말이 쉬워 꽃잎 1톤이지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10만 송이를 딴다고 생각해보라! 장미 정유가 금값에 버금가는 이유다.

증류를 마친 통 속에는 향기를 빼앗기고 색과 결이 시든 장미꽃잎이 남아있다. 많은 시간과 보살핌, 그리고 일일이 손으로 수확해야 하는 번거로움. 이런 과정을 거쳐 이곳으로 온 향기로운 꽃잎이 일순간에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하니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연상태에서는 수일이면 사라질 향기가 이렇게 포획돼 유리병 속에 영원히 남게 된다고 볼 수도 있으니 위안이 되기도 한다. 장미 정유를 ‘장미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다음날 인근 장미농원까지 둘러보자 안 의원도 한결 부드러워져서 편한 마음으로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

‘꽃의 여왕’으로도 불리는 장미는 ‘꽃의 왕’인 자스민과 더불어 향료의 정점을 이룬다. ‘샤넬 No.5’가 불멸의 명성을 갖는 이유도 최고급 장미오일과 자스민 오일이 ‘듬뿍’ 들어있기 때문이다. 조향은 ‘장미에서 시작해서 장미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조향사가 수업을 받을 때 처음 모방하는 향이 바로 장미향이고 다른 향을 공부하다가도 수시로 장미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현대 화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장미향의 주성분은 대부분 밝혀졌고 미량성분도 많이 규명돼 그 수가 300가지가 넘는다. 그럼에도 간간히 새로운 장미향 성분이 밝혀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온다. 2000년대 들어서는 생명과학 분야의 연구가 활발해 장미향 성분을 만드는 유전자가 속속 규명되고 있다. 최근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는 홍차향이 나는 중국 장미의 주된 향기 성분인 다이메톡시톨루엔(DMT)를 만드는데 관여하는 효소를 규명한 연구결과가 실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밝혀진 수백 가지 성분을 실제 정유의 비율대로 섞는다면 장미 정유의 향이 재현될까? 양으로 따지면 99.9%는 재현돼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계가 분석한 데이터를 보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겠지만 숙련된 사람의 코는 장미 정유의 섬세한 생동감을 바로 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향수 회사들이 여전히 최고급 향수에 천연 장미 정유를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리는 이유다.

기자의 책상서랍 한 켠에는 장미 정유 몇 병이 고이 모셔져 있다. 심신이 지쳤을 때 종이에 정유 한 방울을 떨어뜨려 ‘장미의 영혼’을 들이마신다. 단단히 농축돼 수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장미 향기가 마음에 잔잔히 스며든다. “냄새는 분자가 후각상피를 자극해 거기에 연결된 신경이 내보내는 신호패턴을 뇌가 해석한, 즉 뇌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는 현대 신경과학의 해석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면서도 장미 향기를 맡을 때만은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압도되곤 한다.

글 |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